폭발적으로 분출된 촛불 시민의 염원과 기대에 대한 배신과 무능과 실패, 그 뒤에 곧바로 이어진 참담한 퇴행의 악몽과 극심한 내란의 스트레스를 고통스럽게 통과하며, 나는 ‘사랑과 시간’이라는 화두를 오래도록 생각했다. 그리고 한국소설은 그런 가운데서도 계속 씌어졌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 어째서 사랑일 수밖에 없는지를,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과 기다림인지를, 그것이 어떻게 (바디우의 주장처럼) 삶을 재발명하고 진리와 보편과 코뮌으로 도약하는 힘인지를 자기만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비평은 그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견뎠고, 그 간곡한 기다림과 사랑의 언어를 늦게나마 헤아리고 받아 적으려고 노력했다. ‘사랑의 혁명’이라는 제목을 얹은 연유다.
(「책머리에」, pp. 4~5)
시차와 시대착오를 통해서라도
어떻게든 동시대를 살아보려 한 기록
문학평론가 김영찬의 네번째 비평집 『사랑의 혁명』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텍스트에 대한 섬세한 분석과 사회경제적 맥락에 대한 거시적 통찰을 아우르는 종합적이고 균형적인 비평”(제22회 팔봉비평문학상 심사평)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새로운 화두를 던지며 현실 속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온 그의 비평은 읽는 이로 하여금 문학작품 너머의 삶에 대해 사유할 수 있도록 독려해왔다. 한국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문학비평이 견지해야 하는 태도에 관해 집중적으로 다룬 세번째 비평집 『문학이 하는 일』(창비, 2018) 이후 7년 만에 묶어낸 이번 비평집은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을 통과하며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삶을 재발견하고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도약하는 한국문학과 소통해온 그가 어떻게든 동시대를 살아보려 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혁명이 가능하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랑과 시간’이라고 한 소설가 최인훈의 말을 이제는 조금 가늠할 수 있겠다고 말하는 저자는 문학작품을 하나의 일시적인 현상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문학이야말로 우리가 되새겨야 하는 과거이자 함께 나아가야 하는 미래의 지표로 보는 것이다. 지난 22년간 한국 사회의 여러 징후를 예민하게 포착해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담론의 장으로 끌고 와서 삶의 경이와 허무에 대해 끊임없이 골몰해온 그에게 독자란 이 시대를 함께 읽고 싸워나가는 또 하나의 동료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왜 여전히 문학을 붙들고 있는가에 대한 답변으로 그것만이 사랑이라는 고통의 시간을 견딜 수 있는 혁명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라 말하는 김영찬의 글은 우리가 믿고 의지해온, 앞으로도 함께 나아갈 연대와 희망의 상징이 되어줄 것이다.
문학을 둘러싼 거대한 지각변동
독자는 더 비판적인 시각을 갖춰야만 한다
1부 ‘사랑과 시간’의 「보이지 않는 자들의 혁명」에서 김영찬은 한국문학사에서 혁명을 사유하는 두 편의 소설을 나란히 두고 혁명이 무엇인지, 그것이 가능한 것인지에 관해 묻는다. 4·19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묘사하는 장편소설 『회색인』(1964)에서 작가 최인훈은 주인공 독고준의 입을 빌려 사랑이 혁명을 구원할 수 있을까,라고 독자에게 묻는다. 그로부터 반세기 만에 황정은은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창비, 2019)에서 혁명의 불가피함과 연대의 필요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다. 세월호 참사와 탄핵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은 현실 속에서 “황정은은 이 소설에서 특히 분리와 배제와 혐오라는 통치의 도구가 어떻게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안에 내면화되어 삶과 일상의 습관을 지배하는지를 전면에 부각”(p. 29)하며 “혁명의 이야기를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이야기로 젠더화한다”(p. 32).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혁명에 대해 짚어나가면서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되묻는 김영찬의 비평은 한국문학이 역사와 함께 소통해온 과정을 면밀하게 짚어나간다. 제주 4·3 사건과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남긴 상흔을 다룬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와 세월호 이후 상실의 고통과 죄의식을 떠안은 한국문학의 불가피한 증상과 함께 나타난 권여선의 두 장편 『토우의 집』(자음과모음, 2014), 『레몬』(창비, 2019)도 이에 해당한다.
2부에는 1980년대의 정치적 압박에서 벗어나 1990년대의 자유의 물결 사이에서 일었던 “폭력과 소외와 광기로 얼룩진 과거의 상처를,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그 상처를 자기 자신의 몸으로 앓고 있”(p. 137)는 “너무 일찍 도래한” 백민석의 작품 세계와 “낡은 미학적 보수주의와 새로움의 포즈가 공존하는”(p. 160)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 그리고 1990년대 등장한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사회적 현상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3부에는 최제훈, 엄우흠, 이수경, 권여선, 윤성희, 백수린의 소설, 한국문학의 눈부신 성과라 할 수 있는 작품들을 깊이 있게 다루었다. 4부에는 최인훈, 이청춘, 백인빈, 이제하, 김승옥, 전상국, 이수형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독자들이 꼭 접해야 하는 근대문학 작품을 다룬다. 이때의 “한국소설은 이를테면 근대문학의 유령들이다. 한국의 일그러진 역사와 현실의 증상을 제 몸으로 앓았고, 그리하여 저 스스로 증상이 된 소설들. 이들은 비록 죽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한국문학을 성찰하는 데서도 이 유령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작업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 데리다의 말처럼, ‘산다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책머리에」, p.6). 저자는 오늘날의 우리가 1969년에 발표된 이청춘의 소설을 읽어야 하는 것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불행하고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이 “세계를 향해 자기의 진실을 주장”(p. 270)하는 과정을 살핌으로써 근대의 문학정신을 애도하고 계승해야만이 새로운 창조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이렇듯 문학 안에서도 각 시대와 다양한 세대 간의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는 앞으로 “장르의 벽을 넘어 문학에만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분석을 하고 싶”(『계명대신문』)다고 밝히며 5부 ‘문학 영화 카페’에서는 본격 영화비평이 아닌 문학비평의 문제의식을 다른 장르로 확장한 글을 묶음으로써 신상옥 영화 「상록수」와 나운규의 「아리랑」을 다룬다. 문학작품과 사회 현상을 두루 살피는 김영찬의 비평은 우리 시대의 지성으로 언제나 사랑과 혁명이 있는 곳에서 등불을 밝히며 문학과 독자들의 가장 든든한 동료로 곁을 지키고 서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