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조선 중기를 배경으로 살인과 음모의 뒤를 캐는
역사추리 소설이다
소년 급제하였으나 스물여덟 되도록 관직을 받지 못해 생활고를 겪던 유생 김설은 어느 날 놀라운 제안을 받는다. 입기현이라는 마을에 내려가서 죽은 석혜 선생이 갖고 있던 천란이라는 난초를 가져오면 대갓집 사위 자리를 내줄 수도 있다는 것. 그저 시골 마을에 내려가 난초를 찾아오면 되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김설은 살인사건과 마주한다. 석혜 선생의 죽음은 사고가 아닌 살인으로 의심되고, 심지어 죽은 이는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죽음의 그림자는 계속 마을 사람들을 드리운다. 사고인가 살인인가. 살인이 맞다면 범인은 누구이며 의도는 무엇인가. 이것은 천란이 사라진 사건과 관계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모든 것은 우연인가 함정인가.
≫ 이 책은 이성과 감성, 현실과 망상, 욕망과 명분 사이의 간극을 추적하는
심리추리 소설이다
입기현 마을은 참으로 기묘했다. 분명 평화롭기 이를 데 없다 들었는데 수면 아래 살기가 도는 긴장감이 가득하다.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여인 고채는 마을을 먹여 살리는 거상이자 실질적인 수장이다. 한쪽 얼굴이 일그러진 무당 을그미는 불쑥불쑥 나타나 김설의 혼을 빼놓는다. 성균관 동문 정진허는 어찌해서 이처럼 작은 마을에 내려와 있는지 수상하기 이를 데가 없고, 민하겸은 미끈한 낯으로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홀리고 다닌다. 김설은 그저 석혜 선생 죽음의 내막을 파헤치고자 했는데, 사라진 난초를 찾고 싶었을 뿐인데, 어째서 이토록 이해 못할 상황에 맞닥뜨린 채 죽음의 위험에까지 빠졌는가.
그는 성균관에서 배운 리(理)로 세상을 해석하려 하지만, 이 마을에는 김설이 배운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만 통하는 낯선 질서가 있다. 이것은 곧, 마을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가르는 원칙이다.
≫ 이 책에는 입체적 캐릭터들의 병립과 대립이 살아 있는
정념의 소설이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네 사람이 있다. 김설, 확증편향에 빠진 유생. 고채, 병법을 읽고 실행하며 실질적으로 마을을 통치하는 거상. 정진허, 세상을 냉소하면서도 구원을 꿈꾸는 귀족. 민하겸, 누구에게나 유혹적이지만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미청년. 이 네 사람의 관계는 병립과 대립으로 얽혀 있다.
함께 걷다가도 손을 놓고 서로를 공격한다. 나란히 마주 서서 관계를 이어가다가 엇, 하는 순간에 조선 중기 수직적 관계 공식을 따른다. 누가 범인인가. 누가 누구를 속이는가. 그는 진심인가. 그녀는 진심인가. 끝없이 의심하고 캐묻고 돌아섰다가 잡아챈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선과 악, 옳고 그름, 적과 동지 같은 이분법에서 벗어나 있다. 각자의 욕망과 판단, 상처와 망상이 충돌하며 서사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리의 세계》는 감정에 따라 흘러가는 일종의 정념의 소설이다.
≫ 이 책은 누가 무어라 해도, 사랑 이야기다
김설의 고채에 대한 감정은 어지러이 굴곡지다. “이 집 아가씨는 뭐랄까, 좀 이상하게 생기지 않았나?” 모두가 절세가인이라 칭하는 고채의 첫인상을 두고, 김설은 엉뚱한 말을 한다. 그러더니 한순간 주책없이 고채에게 빠져든다. ‘고채는 속세의 사람 같지 않았다. 그녀를 감싼 공기만 다른 세상의 것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가 없었다. 저항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김설은 이제 저 여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스스로에게 설명하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고채를 눈으로, 귀로, 마음으로 좇던 김설은 더는 숨길 수 없이 빠져 끝내 자신만의 착각과 확신으로 상대에게 활을 날린다. “하, 그렇군요. 내가 잊고 있었군요. 당신은 남자를 잡아먹는 여자였지. 내가 이렇게 멍청하니 맨날 이용이나 당하지. 크크크.”
김설은 말 그대로 고채에게 미쳐간다. 김설이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과 고채에게 미쳐가는 과정은 똬리를 틀어 올리듯 하나로 엮이어 극의 마지막까지 독자의 심장을 조인다. “그 여자는 나를 사랑한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나를 무너뜨릴 생각이었을까?” 김설은 처음엔 고채를 의심했고, 그다음엔 두려워했고, 결국엔 사랑했다. 그 사이에서 김설은 무너지고, 정의와 진실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리의 세계》는 결국 사랑 이야기다. 사랑이 사람을 망치기도 하고, 사랑이 사람을 구원하기도 하며,
그 둘이 구분되지 않을 때, 비로소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래서 마지막 장에 이르면 역사와 추리, 무엇도 아닌 사랑만이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