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영역에서조차 거듭 실패했던 작가 다자이 오사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이었던 그의 삶, 그리고 소설
문학과 철학의 만남으로 나의 삶과 세계를 확장하는 법,
〈그린비 도슨트 세계문학〉 8: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그린비 도슨트 세계문학〉 여덟 번째 권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이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는 환경에서 성장하여 명문 대학에 진학한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보다 높은 지위나 더 많은 만족을 위해 살아가야 할 주인공이 왜인지 여러모로 변변치 못한 삶의 길을 걸으며 고통받다가 끈질긴 시도 끝에 마침내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는 이야기. 이것이 『인간 실격』의 줄거리다. 그런데 왜인지 사람들은 이 ‘실패’의 이야기에 오랜 세월 깊은 관심을 두었고 이 소설은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도슨트 서영채는 그 이유를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한 번은 감당해야 할 ‘생존의 실패’에 주목하여 풀어 나간다. 『인간 실격』은 능력주의의 신 앞에서 멋지게 나가떨어진 한 인물의 투쟁기, 즉 실패를 향한 노력이자 실패를 향한 능력주의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모든 질문은
결국 ‘나의 삶’으로 수렴된다
문학은 우리가 살지 않은 삶을 경험하게 하고, 만나지 못한 인물을 만나게 하며, 겪지 못한 일을 체험하게 한다. 문학을 통해 우리는 작가와 나만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낸다. 이 세계가 없으면 우리의 삶은 온갖 정보와 소음 속에서 더욱 왜소해질 것이다. 문학의 세계가 만드는, 현실과 개인의 삶 사이의 이 완충지대는 반복되는 일상에 묻혀 사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틈을 보여 준다. 그러나 문학만의 특별한 상징과 비유는 독자들을 종종 난관에 빠뜨린다. 그리하여 작품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하거나 읽기를 아예 포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린비 도슨트 세계문학〉은 철학과 인문학자의 시각을 빌려 세계문학의 고전을 읽는다. 이를 통해 저마다의 읽기가 수없이 많은 갈래를 만들고, 거기서 수없이 많은 세계가 생겨난다.
〈그린비 도슨트 세계문학〉의 해설은 문학에 딸린 부록이 아니다. 그 자체로 한 권의 책과 맞먹는 가치를 담고 있다. 이는 문학 작품을 어떻게 읽을까 고민하는 독자들과 자신만의 독특한 사유를 개척하려는 독자들에게 중요한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이 시리즈의 특징은 해설이 시작되는 뒤표지를 앞표지처럼 구성하여 해설을 첫 페이지처럼 읽도록 한 것인데, 문학과 맞물려 읽는 철학 혹은 사유의 긴밀함을 표현한 것이다.
부끄러움 많은 삶 앞에서
죽음을 한낱 지갑 속 지폐처럼 여긴 다자이 오사무
“저에게는 서로 속이면서도 맑고 밝고 명랑하게 살고 있거나 살아갈 자신을 갖고 있는 듯한 인간이 난해할 뿐입니다. 인간은 끝내 저에게 그 비결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알았다면 저는 이렇게 인간을 두려워하거나 필사적인 서비스 같은 걸 하지 않아도 되었겠지요. 인간의 생활과 대립하며 밤마다 이런 지옥의 고통을 맛보지 않아도 되었겠지요.”(본문 27쪽)
엄청난 부잣집의 막내 도련님으로 태어나 물질적 부족함 없이 성장하여 도쿄제국대학에 진학한 다자이 오사무. 세속적 시각에서는 부러움의 대상일 수 있는 그는 정작 평생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스스로를 조롱하다가 죽음을 마치 지갑 속에 든 지폐인 양, 툭하면 자살을 시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시도를 성공(?)시켰다. 다자이는 살아가는 내내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충동적이고 자기를 통제하지 못해 쩔쩔매는 자신을 무감하게 바라보는 『인간 실격』의 주인공 오바 요조는 거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실격』은 여타의 수기 형식의 자전적 소설과는 다르다. 다자이는 자신의 감추어진 내면을 드러내는 방식을 싫어했다. 그래서 고백처럼 보이는 가짜 고백, 즉 비-고백이라는 독특한 글쓰기 방식을 택했다. “부끄러움 많은 인생을 살아왔습니다”라는 고백으로 시작하는 수기 속 오바 오죠, 그러니까 다자이 오사무에게 글쓰기, 즉 문학은 목숨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죄의식이나 통렬한 회한이 아니라 ‘부끄러움’이었다.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사람, 자기의 부족한 능력을 스스로 한심해하는 사람의 마음이 곧 부끄러움이었다.
능력주의 세계 속에서 고통받는 실패자들이여
여기 더 크게 실패한 자의 이야기가 있다!
다자이 오사무의 대표작이자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작품『인간 실격』. 다자이의 소설은 대체로 자전적인 요소가 많지만 『인간 실격』은 더더욱 그렇다. 세 편의 수기와 그 수기들을 둘러싼 액자로 구성되어 있는 이 소설은 한 소설가가 술집 주인에게 세 편의 수기와 사진 세 장을 전해 받아 독자들에게 공개하는 형식으로, 변주가 있기는 하지만 세 편의 수기 전체의 시간 구성과 단락의 세목이 작가 다자이의 삶의 궤적과 대체로 일치한다.
다자이의 부끄러움은 모종의 윤리적 부채감으로, 예민한 감수성과 지나치게 강한 자의식을 가진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얻지 않은, 태어나 보니 주어져 있는 자신의 환경이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았다. 불법이나 탈법, 비인간적인 면모 등이 여기저기 배어 있는 집안의 엄청난 부는 윤리적으로 예민한 눈을 가진 다자이에게 떳떳하게 내세울 만한 것이 못 되었다. 하지만 그런 한편 그는 그 돈으로 무절제한 생활을 했다. 소설을 쓰기 위해. 소설을 쓰느라 학업도 뒷전이었고, 그러느라 취직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삶은 역설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 다자이는 왜 자살 시도에서 네 번이나 실패한 것일까. 아쿠타가와는 단 한 번의 시도로 성공했는데. 다자이가 아쿠타가와와 구분되는 것은 바로 그런 점일 것입니다. 다자이의 문학적 개성이 지니는 고유성 또한 바로 그런 점에서 드러난다고 해야 할 거예요. 아쿠타가와의 죽음은 전형적인 우울증 환자의 경우에 해당하지만, 다자이의 마지막을 결정한 것은 우울증이 아니라 치명적인 수준이 된 폐결핵이라고 해야 할 거예요. 어쨌거나 자살이 생존 실패의 표현이라면, 다자이는 그 실패의 영역에서조차 거듭 실패한 경우에 해당해요. 이중의 실패인 것이죠. 실패가 나약함이나 무능력으로 인한 것이라면, 두 곱의 나약함, 두 곱의 무능력인 셈이에요. 영웅이 아니라 인간에 훨씬 가까운 것이죠. 네 번의 자살 실패란 그러니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라고나 해야 할까.”(도슨트 서영채와 함께 읽는 『인간 실격』, 해설 22쪽)
모든 유기체는 무기물에서 와서 무기물로 돌아간다. 사람의 경우도 그렇다. 모든 삶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죽음이다. 생존의 실패는 모두가 예외 없이 한 번은 경험해야 하는 운명이다. 그런데 다자이는 비난받을 일을 자처하며 실패한 삶을 향해 나아갔고, 그것을 동력 삼아 글을 써 나갔다. 세속적 성공과는 정반대에 있는 커다란 실패를 향해 작은 실패를 거듭하고 그 실패를 차근차근 기록한 다자이 오사무. 그 실패의 기록들은 어쩌면 능력주의 세계에서 고통받고 있는 실패자들을 오래도록 위로해 주고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