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나는 늘 돈을 버는 나에게 빚을 지고 있다.”
일곱 시간 반 근무, 한 시간 식사, 삼십 분 휴식…
일주일의 반을 정직한 노동의 세계로 걸어 들어간
작가 하현의 노동밀착형 에세이
2014년, 영화감독을 꿈꾸던 스물한 살의 대학생 하현은 촬영 과제를 위한 비용을 마련하고자 마트로 향한다. 식품 코너에서 두유를 팔다가 주류 매니저의 눈에 들어 와인을, 어쩌다 커피를 팔게 되면서 파견직으로 시작한 마트 판촉(시식, 할인, 덤 증정, 경품 추첨 등의 일)은 때론 일주일간, 때론 6개월에서 1년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중간중간 고용이 안정된 직장에 어렵게 들어가 정규직으로 일하기도 했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 1인분이 아닌 2인분, 3인분을 요구하는 회사에서는 도저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트로 돌아온 작가는 “가장 눈에 띄는” 동시에 “전경에서 물러나 배경이 되는” 희미한 유니폼을 입고, 동료와 손님에게 우렁차게 인사한다. 알려주는 이 없이도 모든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고, 인센티브는 없지만 자꾸 늘어가는 영업멘트로 행사 제품을 팔며, 타사 제품을 찾는 손님에게도 언제나 친절하게 대한다. 퇴근 후 방전이 될지라도, 작가로서 글쓰기를 지속하기 위해 선택한 마트 일은 읽고 쓸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인세로 충당하기 어려웠던 생활비를 보장해주었고, “글쓰기를 통해서는 절대 얻을 수 없었”던 “내 시간과 노동력이 돈으로 교환되고 있다는 감각”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작가는 14년 동안 여덟 개의 매장에서 일하며 일곱 권의 책을 썼다. 《어쩌다 마트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는 작가가 긴 시간 동안 마트 일을 하며 글 쓰는 나와 일 하는 나 사이에서, 하고 싶은 일과 안정적인 미래 사이에서 해온 고민과 더불어 불분명하고 애매한 존재로서의 자신, 마트라는 공간과 그 안의 사람들을 깊이 있게 바라보게 된 과정을 담았다.
나는 일주일을 반으로 나누어 산다. 마트 직원으로 사는 날에는 모호했던 모든 게 분명해진다. 이 노동은 정직하다. 일곱 시간 반 근무, 한 시간 식사, 삼십 분 휴식. 하루 동안 내가 해야 할 건 그게 전부고 그 모든 걸 끝내고 나면 10만 원을 번다. 가만히 서서 손님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이 가끔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건 글쓰기를 통해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보장. 내 시간과 노동력이 돈으로 교환되고 있다는 감각이 이토록 소중한 것인지 작가가 되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_p.153-154, 3장「10만 원의 감각」 중에서
마트 일에 대한 내 마음은 언제나 양가적이었다. 출퇴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내가 가진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바닥까지 쪽쪽 빨아먹었던 일들과 다르게 마트 일은 글을 쓰고 책을 만들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그게 고맙다가도 한 번씩 허탈해졌다. 그런 여유가 가능한 이유는 이 일이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받을 만큼 안정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매 순간 실감했다. 일곱 권의 책을 쓰는 동안 나는 20대를 지나 30대 중반이 되었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생활이 흔들리는 순간 꿈은 찬란하게 빛나기를 멈추고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_p.263, 「에필로그 : 우리 이야기」 중에서
“그래, 자기가 우리 이야기 좀 써줘.
써서 사람들한테 꼭 알려줘.”
꿈을 위해 파견 계약직을 선택한 청년부터
생계와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는 동료 언니들까지
마트에서 마주한 평범하지만 빛나는 ‘우리’의 이야기
하현 작가는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하면서도 과도한 업무로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일을 찾아 마트로 향했다. 그곳에는 작가처럼 좋아하는 일을 위해 정규직이라는 보장된 이력을 포기하고 계약직을 자처한 회사 밖 청년 “세연 씨”가 있었다. 나에게 어울리는 자리를 찾기 위해 향한 마트에서조차 “얼른 자리 잡아야지!”라며 나무라는 동료 언니들의 따뜻한 잔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작가는 세연 씨와 이야기를 나누며 작은 용기와 위안을 얻는다. 수십 년 동안 여러 대형마트와 백화점을 거쳐 기업형 슈퍼마켓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는 작가의 엄마처럼, 마트 노동자의 대부분이 중년 기혼 여성이다. 작가는 엄마와 비슷한 나이의 동료 언니들이 생계를 위해, 용돈을 벌기 위해 마트로 출근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직장은 아니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삶을 꾸렸던 언니들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하지만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깨닫는다.
에세이스트라는 직업이 주변에 알려지자, 한 언니가 나지막이 전한 “자기가 우리 이야기 좀 써줘. 써서 꼭 알려줘”라는 말은 오래도록 작가의 마음에 남았다. 마트를 찾아온 손님들에게도 마트 밖 사회에서도 마트 일은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받기 어려웠지만, 한편으로 작가에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여유와 꿈을 꿀 수 있는 생활의 안정감을 전해주었다. 작가는 마트에서 상처받으면서도 마트를 사랑할 수밖에 없던 시간을 통해 동료 언니가 말했던 ‘우리 이야기’가 무엇인지, 그 이야기를 어떤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지 그 방향을 잡아갔고, 긴 시절을 거쳐 한 권의 책에 그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다.
“누가 마트에서 일하라고 칼 들고 협박함? 그러니까 열심히 살아서 좋은 직장에 들어갔어야지 ㅋㅋㅋㅋ” 우리 매장에서 젓갈과 반찬을 파는 경자 언니는 젊은 시절 유치원 선생님이었다. 그래서인지 언니가 멘트를 치면 나긋나긋한 말투인데도 내용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 그 옆에서 건강식품을 파는 애란 언니는 대학병원 간호사였다. 이제 다 지난 일이라며 손사래 치지만 누군가 아프면 모른 척하지 않고 꼭 도움을 준다. 스물둘에 결혼해 일찍 엄마가 된 즉석조리식품 코너의 윤희 언니는 자식 셋을 키우며 빛나는 젊음을 온통 육아에 쏟아부었다. 그냥 넘길 수도 있었던 그 댓글 하나가 못내 속상했던 건 선명하게 떠오르는 얼굴들 때문이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지 못하면 목소리를 낼 자격도 없는 걸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삶을 꾸렸던 언니들이 도대체 얼마나 더 열심히 살아야 했을까? _p.131, 2장「옥이 언니」 중에서
언니가 말했던 우리 이야기는 뭐였을까. 언니가 말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하얗게 빛나는 모니터 앞에서 한 글자도 쓸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에 사로잡힐 때면 언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날 마셨던 사과 맛 요구르트와 내 어깨를 토닥이던 언니의 손길이 꼭 미리 받은 책값 같아서 어떻게든 이 책을 완성하고 싶었다. 언니가 나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지 생각하다 보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둘이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계속해서 마트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 _p.265, 「에필로그 : 우리 이야기」 중에서
“마트는 나를 ‘그래서’ 사랑하고,
나는 마트를 ‘그럼에도’ 사랑한다.”
애국자 아저씨, 돌봄이 필요한 노인과 아이들까지
까르푸를 사랑한 IMF키드 하현이 바라본
오늘날 마트라는 공간과 그 안의 사람들의 가치
팬데믹이 발생하고 새벽 배송이 보편화되면서 마트는 고객도, 직원도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시설”이다. “크고 작은 사회적 이슈나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정도다. 2019년 7월, 한일 무역 분쟁으로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직원들에게 음료수를 던지며 “매국노 새끼들아!”라고 욕설을 퍼붓는 애국자 아저씨로 인해 미소된장과 고추냉이, 일본 과자는 물론, 인도네시아산 가쓰오부시(가다랑어포)까지 모두 매대에서 치워야 했다. 코로나 초기, 공적 마스크 판매처 중 하나가 된 마트를 두고 긴 줄이 둘러쌌고, 직원들은 터무니없이 적은 수량에 화가 난 사람들을 상대해야 했다.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 방류를 앞두고는 소금 사재기가 성행”했고, “종량제봉투 가격 인상이 예고”되면 매장 재고가 동이 난다. 북한과의 갈등이 심화되거나 태풍이 예보되면 지금도 “라면과 즉석식품의 매출이 눈에 띄게 오”른다. 그러나 마트 직원이 필수 인력으로도, 노동자로서도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작가는 안타까움을 전한다.
또한 마트를 찾을 수밖에 없는 손님들의 일화를 통해 마트가 여전히 우리 삶에 중요한 공간임을 보여준다. 부모가 퇴근하기를 기다리는 아이들은 마트 안 놀이시설과 패스트푸드점에서 시간을 보내고, 매일 출근하듯 마트를 들르는 노인은 시식 코너를 돌며 배를 때운다. “가족도 친구도 나라도 아닌 마트”에 의지하는 이들을 보며 작가는 지나간 과거와 혹 올지 모르는 불안한 미래를 본다. 이 책은 일상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공간으로서 마트가 가진 의미와 가치에 대해 내부자의 시선으로 생생한 이야기를 전한다. 이를 통해 독자는 너무도 익숙한 공간인 마트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낯선 눈으로 바라보고 우리 주변과 사회에 보다 더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이다.
평화롭던 매장이 혼란에 빠질 때마다 깨닫는다. 마트는 단순히 생필품을 파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과그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갈등이 투영되는 이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카트에 담는 물건들과 장을 보며 주고받는 이야기에는 그들의 생활이 녹아들어 있다. 무엇을 소비하고 무엇을 소비하지 않을지 선택하는 것은 한 사람의 가치관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 모든 선택은 서로 맞물리고 부딪치며 언제나 더 큰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마트는 그렇게 일상적인 공간인 동시에 정치적인 공간이 된다. _p.108, 2장「아저씨, 그거 진짜 애국 맞아요?」 중에서
마트를 사랑해서 자주 화가 난다. 언니들은 그러려니 넘기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지치지도 질리지도 않고 계속 속상하다. 마트는 직원일 때의 나와 손님일 때의 나를 칼같이 분리해 다르게 대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해서 마트가 좋다가도 밉고 밉다가도 다시 좋아진다. 마트는 나를 ‘그래서’ 사랑하고, 나는 마트를 ‘그럼에도’ 사랑한다. 무언가를 그럼에도 사랑하는 일은 어쩔 수 없이 짝사랑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 손님인 내게 한없이 친절하고 다정했던 마트가 직원인 나를 조금도 존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언젠가는 이 짝사랑을 그만둘 날이 올까? _p.214, 4장「좋다가도 밉고, 밉다가도 좋은 중에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