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면을, 모형을, 기억을 떠올리는 나는 도면 속을, 모형 속을 걷고 싶어진다
이일훈은 그 책을 엮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모형 사진은 내 건축의 일부이며 또 그 모형에 대하여, 모형을 통하여 보이는 이야기는 내 생각의 일부분이다. 누구든 ‘너 자신을 알라’고 일갈(一喝)하지만, 둔한 나는 아직도 나를 모르겠다. 원래 모르는 놈이 말 많고 가방 큰놈이 살림 복잡한 법이다. 그 티를 잔뜩 묻히고서 부끄럽게도 건축을 대하는 속내를 묶는다.”
이일훈에게 모형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의 생각을 담을 수 있으니 모형은 생각의 집이며 꿈의 집이다. 꿈은 삶이고 삶 또한 꿈이다. 꿈이든 삶이든 깨기도 하지만 이루어지기도 하니까. 모형의 운명 또한 꿈의 운명을 닮았다.” 종이나 스티로폼은 가벼워서 모형 만들기가 비교적 쉽지만, 그렇다고 버릴 때의 아쉬움마저 가벼운 것은 아닙니다. “이때의 아쉬움은 무거운 안타까움에 쓸데없는 아까움까지 겹쳐 있다. 버려지기 직전의 모형을 보면 세상에 할 말이 많이 남은 듯 조바심이 가득하다.”고 털어놓습니다.
이일훈은 집의 구성과 공간이 그려진 평면도 ‘위’를 걷는다고 합니다. “아니, 평면 ‘속’을 걷는 셈이다. 그럼 누가 아나, 늘 사는 집의 평면을 연상하며 건축적 이해에 도움이 되는 버릇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러고 보니 무엇이든 평면/입면/단면이라는 도면의 형식으로 파악/표현하려는 건축가의 버릇/습관이 배어난 디자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도면에 대해 한마디 덧붙입니다. “책처럼 악보처럼 지금 나와 대화하는 상대처럼, 아니 마음처럼 도면을 ‘읽는다’. ‘보다’와 ‘읽다’의 큰 차이는 상상력의 진폭이다.”
이일훈은 땅과 건축물 사이를 이렇게 말합니다. “땅의 특성과 건축물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관계 맺게 하는가, 안전성에서 위생적 처리까지 많은 사항을 조직하고 구성하는 것은 건축가의 몫이다. 건축은 아주 보편적인 것에서부터 아주 특별한 것으로 해법을 찾아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궁금해합니다. “눈이 없으면 보지 못하듯 길이 없으면 집에 이르지 못한다. 길과 붙은 집들이 길과의 연관성을 소홀히 하면 집은 그저 콘크리트 상자일 뿐. 집 한 채 지으며 동네를 바꾸는 꿈을 꾸고 그렸는데, 10년도 더 지난 지금 그 주변은 어떻게 변했을라나.”
이일훈은 늘 새로운 지형(地形)을 꿈꿉니다. “건축 또한 지형의 일부다. 지난한 삶의 지형/건축! 건축이 삶의 전부인 양 생각하면서도 건축을 통해서 내 삶을 건지지는 못했다. 결국 꿈꾸는 건축/지형을 통해 좌절하고 또 실망하면서도 건축을 버리지 못했다는 고백이 뒤따른다.”
건축에서 이웃을 잃으면 그것이 폐허와 무엇이 다를까
채나눔의 건축가 이일훈은 유쾌합니다. 자발적인 불편함을 받아들이고(불편하게 살기), 될 수 있으면 자연을 가까이 접할 수 있는 바깥 공간을 만들고(밖에 살기), 동선을 늘려 공간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면(늘려 살기) 환경에도 이롭고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채나눔’은 작은 집만을 위한 설계 방법론이 아니라, 이 세상을 향해서 한 건축가가 제안하는, 아주 보편적이기를 갈망하는 주장이다. 말하자면 ‘작을수록 나누자’는 주장이 작은 집만 다루는 건축가로 소문이 난 셈인데, 그래도 유쾌하다. 즐거운 오해다.”
이일훈은 꾸준히 종교 건축 작업을 해왔습니다. “수도원 건축물의 형태가 번잡하고 요란하면 왠지 경망스럽다. 아니 수도원/종교 건축물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집이 그렇지 않은가. 집을 보면 주인이 보인다는 말은 그래서 맞다. 건축가의 말에 예의를 갖추는 건축주를 보면 나는 그만 감동하고 만다.” 주어진 조건에 따라 설계방법론을 건물과 엮어내거나 사용자로부터 결정적 단서를 찾아내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일훈은 희망과 위로를 건네는 공간, 사회적 건강함이 읽히는 프로젝트도 꾸준히 해왔습니다. “비움의 장치가 가능했던 것은 세상을 껴안는 뜻과 정신을 먼저 품고 그렇게 살고 계신 여러분들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비록 거칠고 질박한 모습이지만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껴안은 공부방에서부터 녹록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심장 같은 방 하나는 꼭 두고 싶었다는 평화센터까지.
이 책을 먼저 읽은 전진삼(격월간 와이드AR 발행인)의 추천사입니다.
“돌아보니 건축민박학교에서 형과 함께했던 추억은 시간 상자라는 모형 속을 걷는 일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제목이 기막히게 예지적이다. 건축 설계를 업으로 사는 이들에게 애물단지가 돼버리기 일쑤인 모형이 타임머신이자 서사의 샘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고, 걷기라는 천천히 사유함의 속도계까지 부착시켜놓았으니 건축함에 관한 더 이상의 간명한 정의가 있을까. 건축 설계를 하던 매 순간 성찰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건축가는 어떻게 사는가를 질문하는 사람이라고 에둘러 정의하고는 우리 곁을 떠나 모형 속으로 걸어 들어간 형에게서 평생 참 건축을 향해 정진했던 수행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세상과 사람과 건축을 믿고 짝사랑한 사람, 건축가 이일훈 형을 기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