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 공장 횡령 사건·법정의 연기자들·
존속살해예비죄의 아들·검찰청 여사님들의 꽃놀이
작가지망 검사의 공소장…”
입증되는 세계와 입증되지 않는 세계까지
샅샅이 파헤쳐 되살린 공소장 이면의 기록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 책의 1부에서는 저자가 경험했던 실제 공소 사건들을 바탕으로 ‘사건 외곽의 풍경들’을 들여다본다. 가출 청소년들 사이에서 ‘삼촌’이라 불리며 아이들을 회유, 협박해 범죄를 저지르게 하는 한 남자, 성공에 대한 확신과 폼생폼사로 살았던 어느 젊은 사업가가 사기죄로 인해 한없이 무너져내린 단 몇 개월간의 시간, 불법촬영물 범죄로 잡혀 왔으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연기로 법정의 모두를 숨 막히게 했던 피고인의 웃지 못할 사연 등 공소장에 못다 기록한 사건 이면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2부에서는 선배 검사의 방에 더부살이하던 저자가 민원실 옆방을 배정받고 곤욕을 치른 경험, 법무연수원 교수로 근무하던 시절 ‘쪽박산’을 오르며 다시 한번 ‘비주류 검사’로서의 입지를 다지던 기억, 회식 자리에서 2인자에게 술을 따르지 않아 한때 사직서까지 고려해야 했던 검찰 내부 문화에 대한 내적 갈등까지 매회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가득 담겨 있다.
3부에서는 tvN 〈유 퀴즈〉 출연 당시 보여주었던 올리브그린색의 도시, 상주 지청장으로 지냈던 시간들을 들려준다. 10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감 수확철에는 검찰청 소환 조사도 미뤄지는 곶감 시티 상주, 첫 출근길에 할미꽃 화병을 건네는 ‘심쿵 요정’ 사무처장님 이야기, 검찰청이라는 삭막하고도 살벌한 곳에 뿌리내린 할미꽃을 시작으로 상주지청의 검사 3인방 B·T·S의 활약, 구내식당에서 매일 제철 재료로 검찰청 식구들의 든든한 한 끼를 책임지는 성 여사님과 환경미화를 담당하는 권 여사님과의 에피소드 등 풍성한 ‘이끼 검사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떠나지 않고 여기에 있다. 무너질 듯 위태롭게 기록이 쌓인 검사실 책상 귀퉁이에 시를 붙여두고 한 번씩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날로부터 많은 시간을 지나왔다. 18년쯤, 출근을 하고 사건들을 마주하고 가끔 뿌듯해하거나 간혹 후회하며 어쨌든 검사로, 직장인으로 살아왔다. 범죄로 구성되는 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세상과 삶이라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도 아련한 것들로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입증되는 세계와 동등하게 입증되지 않는 세계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290~291쪽)
“인간이라는 연약한 종족에 대해 낙관을 잃지 않는 것이
법을 다루는 이들이 가져야 할 본분이다”
범죄라는 이름의 재난 속에서도
끝끝내 삶의 결을 헤아리는 눈부신 마음
사법에 관한 불신이 가득한 시대다. 특히 검찰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추락한 지 오래다. 그만큼 출간을 앞두고 저자의 고민도 깊었다.
“이 시대에… 검사된 자가 책을 낸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될까,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해보는 날들이 많았다. 나는 마치 무너져가는 왕국의 성곽에 꽃을 심는 한가한 정원사가 아닌가 생각해본 날도 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고쳐먹는다. 애초에 이 성곽이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답은 조금 더 명확해진다.”(8쪽)
저자는 범죄의 땅을 일구는 방식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반성과 촉구가 내려앉고 있으며, 그리하여 검찰은 어떤 방식으로든 변해갈 것이라며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 땅에서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바는 지금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이렇게 답을 찾아본다. “범죄라는 이름의 재난 앞에 소중한 이들의 다정함을 지켜내고자 하는 것, 그러한 방식으로 인간이라는 연약한 종족에 대한 낙관을 잃지 않는 것”.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시대에 그 낙관을 위한 애씀의 흔적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농부의 딸은 세상에 나가 검사가 되었다. 사람들의 삶 속에 범죄라고 이름 붙은 것들을 찾아내고 분석하고 분류하고 그에 마땅한 답을 고르는 일을 한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이 일을 잘 해내려면 먼저 토양이 되는 사람들의 삶의 결을 이해해야 한다. 지금은 다만 황막한 범죄의 현장일 뿐이지만 어느 과거에는 바다이거나 산이었을지 모를 땅의 역사를, 그 땅 위에 내려앉았을 어둠과 바람과 햇살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기껏해야 유죄와 무죄로만 구축되는 이 옹졸한 세계에서 인간에 대해 희망을 품는 일은 번번이 실패하고 말 것이므로.”(305~3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