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는 처음부터 STS SF였다”
과학-기술-사회를 가로지르는 SF 읽기
왜 SF인가? 저자가 주목한 것은 SF가 과학기술에 기반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과학기술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이며 “삶을 구석구석 좌지우지하는 실체”이다. 이처럼 과학기술이 일상을 관통하는 구조적 힘으로 작용하는 시대에, 그 위에 구축된 상상력 또한 지금 여기의 삶과 겹칠 수밖에 없다.
물론 SF가 단지 과학기술의 원리나 이론을 재현하는 데 머물렀다면, 과학 내부의 고립된 서술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SF는 언제나 그 기술이 인간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가, 인간은 그 변화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묻는다. 『노인의 전쟁』에서 노화한 몸을 신체 개조로 되살리는 기술은 노인의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지고, 『소멸 세계』의 인공 자궁은 모성과 가족, 재생산의 윤리를 전면에서 뒤흔든다. 「저희도 운전 잘합니다」에서는 자율주행 시대의 교통 시스템보다도 누가 자동화 기술의 방향을 정하고 그 변화의 비용은 누구에게 전가되는가 하는 질문이 핵심에 놓여 있다.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것은 언제나 ‘기술’이 아니라 ‘인간’이다.
오랫동안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성찰해 온 강양구는 과학의 목소리를 그대로 옮겨 오지도, 과학의 무게에 짓눌리지도 않고서 과학기술의 이면에 필연적으로 드리워질 그늘을 살펴보는 한편, 세계관의 벽을 하나씩 넘으며 우리 사회의 복잡한 문제와 철학적 질문들을 탐색한다. 『세 바퀴로 가는 과학 자전거』, 『과학의 품격』 등으로 과학기술의 사회적 영향과 의미를 따져 묻고, 과학기술에 대한 ‘민주적 통제’라는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제기했던 저자의 관점이 이번 책에도 이어진다. “SF는 처음부터 STS SF였”다고 이야기하는 그는 과학기술에 기반한 상상력을 출발점으로 삼아 역사·정치·경제·문화를 가로지르며 거침없이 현실을 읽어 낸다.
리셋-폭로-실험하라!
망가진 세계의 허구를 들추어내는 SF의 사고실험
이 책에서 SF는 사유 도구이자 정교한 사고실험의 장이 된다. 저자는 ‘리셋’, ‘폭로’, ‘실험’이라는 세 개의 키워드 아래 총 열여덟 편의 SF 작품을 선별해서 우리가 무심코 받아들였던 세계의 작동 방식을 되묻고, 새로운 감각으로 현실을 읽어 내는 시도를 펼친다. 이에 더해 각 작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와, 작품 속 주제와 맞닿아 있는 책들을 함께 소개하며 독서의 지평을 넓혀 준다.
1부 ‘리셋’은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여 온 사회 규범과 가치를 과감히 초기화한 작품을 다룬다. 역사의 주도권이 서양에 있는 게 당연할까? 노인은 더 이상 사회에 쓸모없는 존재일까? 삶은 생존만으로 충분할까? 인종이라는 개념은 과학적으로 타당할까? 영원히 늙지 않고 산다면 행복할까? 다름은 위험하므로 배척의 대상일까? 『쌀과 소금의 시대』, 『노인의 전쟁』, 『스테이션 일레븐』, 『킨』, 『백년법』, 『제노사이드』 등 여섯 편의 SF는 이 같은 질문에서 출발해 ‘서구 중심주의’, ‘노년’, ‘생존과 예술’, ‘인종주의’, ‘수명’, ‘집단 학살’을 둘러싼 주제를 날카롭게 조명한다. 이들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사회의 기본값에 대한 비판적 탐색이며 그 자체로 리셋이라는 사고실험 장치가 된다.
2부 ‘폭로’에서는 우리가 믿어 온 사회 시스템의 균열을 집요하게 파고든 작품이 등장한다. 『리틀 브라더』는 디지털 감시가 일상이 된 사회를,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은 집단적 망각 속에서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모털 엔진』은 문명의 탐욕과 그 파괴적 결과인 불평등의 구조를 들춰낸다. 『영원한 전쟁』은 베트남전쟁의 참상을 외계 생명체와의 끝없는 우주 전쟁으로 치환해 끝없이 반복되는 전쟁의 본질을 비판하고, 『블랙아웃』과 『드라이』는 각각 대정전과 물 부족 사태를 경유해 인류 문명이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있는지 낱낱이 보여 준다. 이들 여섯 작품은 현실의 균열을 포착하는 한편, 익숙한 시스템과 감각을 뒤흔들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진실을 드러내는 강력한 폭로 장치가 된다.
3부 ‘실험’에서는 현재의 과학기술과 사회적 조건을 극한으로 밀어붙여 상상해 보는 SF 여섯 편을 살펴본다. 「저희도 운전 잘합니다」, 『크로스토크』, 『초키』, 『세븐이브스』, 『11/22/63』, 『소멸 세계』 등 여섯 작품은 AI, 뇌과학, 우주생물학, 우주과학, 시간 여행, 생명공학을 토대로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AI가 일상화된 사회가 온다면? 타인의 감정을 실시간 공유하는 기술이 현실화된다면? 외계의 지적 생명체와 조우하게 된다면? 멸종 위기에 놓인 인류가 우주로 탈출한다면? 과거로 돌아가 역사적 불행을 막아 낼 수 있다면? 출산을 인공 자궁이 대신한다면? 이들 작품은 근미래부터 지구 종말 이후의 미래, 이미 지나온 과거의 역사적 현장을 넘나들며 다양한 시나리오를 펼쳐 보인다. 저자는 다른 가능성에 대한 상상이 미래를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는지를 면밀히 살펴보며, 사고실험의 묘미를 느낄 수 있도록 입체적 읽기를 선보인다.
무엇이라도 상상할 것
진실을 외면하지 말 것
끝까지 질문을 놓지 말 것!
재난이 일상처럼 반복되는 시대다. 전쟁과 테러는 물론이고 각종 자연재해부터 팬데믹까지, 국경을 넘어 만연한 폭력과 죽음의 참상이 미디어를 통해 24시간 중계된다. 화면 속 고통스러운 현실은 SF가 그린 디스토피아보다 더 잿빛이지만, 이제는 그조차도 익숙해져 아무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 이렇게 재난에 무감각해진 현실 너머에는 비판적 사고를 발휘하지 못하도록 막는 집단적 무의식의 무한 반복이 숨어 있다. 저자는 고통과 고통이 각축전을 벌이며 오락거리로 전락한 음울한 풍경에서 미디어 비평가 닐 포스트먼의 통찰을 떠올린다.
“『1984』에서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해서 통제한다. 하지만 『멋진 신세계』에서는 즐길 거리를 쏟아부어 사람들을 통제한다. 요약하면, 오웰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헉슬리는 우리가 좋아서 집착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오웰이 아니라 헉슬리가 옳았다.”
- 닐 포스트먼, 『Amusing Ourselves to Death』
닐 포스트먼의 예언은 현실이 되고 있다. 정보와 오락의 홍수와 그로 인한 감각의 마비는 오늘날 민주주의를 뿌리째 위협하고 있다. 이미 망가져 버린 듯한 시대에 ‘망가진 세계’의 모습을 새삼 그려 보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저자는 말한다. SF 작가들이 파국을 상상하는 것은 “그런 세계를 미리 막아 보려는 안간힘”이라고. 정말 그들이 희망하는 것처럼 상상으로 무너진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렇다고 답한다. 오늘이 비록 세상의 마지막이라 하더라도 ‘그다음’을 상상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 그리고 그 상상이 사회적 상상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SF가 지닌 강력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