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본 발자국에 새겨진 의미망
-김선화 평론가 작품해설 요약
임재문 수필가의 《서울구치소의 바람》은 67편의 수필을 8부 구성으로 담아낸 회고적 문학 작품집이다. 작가는 유년기의 결핍과 상실, 성장기의 고독, 공직자로서의 직무 수행, 그리고 문학적 사유를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평생에 걸쳐 탐색한다. 이번 수필집은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조심스럽게 되짚어가며, 독자에게 깊은 공감과 울림을 준다.
1. 유년기 - 상실과 사랑, 뿌리의 기억
임재문의 수필은 어머니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으로 시작된다. 작가는 “엄마!”라는 간절한 부름으로 글을 시작하며, 자신이 어머니를 불러본 적도 없이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던 기억을 되새긴다. 이 상실은 이후 작가의 삶과 감정 전반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의 문학적 정서의 핵심을 이룬다.
그 빈자리를 채워준 인물은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손수 고전소설을 필사해 책을 만들 정도의 교양을 지녔으며,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손자들을 정성껏 길러낸 인물이다. 작가는 할머니가 남긴 쌍지팡이를 통해 그녀의 삶과 사랑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다. 이처럼 유년기의 고통은 단순한 개인사를 넘어, 한국 현대사의 가족상과 여성상을 반영하는 정서적 기록으로도 읽힌다.
또한 작가의 조부 임영식은 3·1운동에 참여해 일제의 탄압을 받은 독립운동가였다. 2019년 광복절에 작가가 유족 대표로 독립유공자 표창을 받은 사건은, 혈연적 뿌리에 대한 자긍심을 드러내며 그의 정체성과 정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가족사 자체가 하나의 ‘작은 역사’로 기능하는 셈이다.
2. 청소년기 - 고독과 자연, 문학적 감수성의 형성
임재문의 성장기는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도 자연과 문학을 통해 위로받고 자신을 확장하는 시기였다. 중학교 시절, 장거리 통학과 도시락도 없이 학교에 다녀야 했던 날들 속에서도 작가는 종달새 소리, 재앙고개 너머 들판, 비 오는 날 비를 맞으며 걷던 풍경 등을 통해 삶의 본질을 체득한다.
이 시기 그는 동백꽃, 대나무, 보름달 등 자연과 교감하며 감수성을 키운다. 특히 보름달을 어머니의 얼굴에 비유하는 장면은 작가의 유년기 상실과 고독이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섬세한 정서로 승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사춘기 시절 동네 소녀에 대한 첫사랑도 수필의 중요한 테마다. 동백꽃 아래서 그녀를 기다리지만 끝내 만나지 못하고, 그녀는 세상을 떠난다. 이 에피소드는 사춘기의 설렘과 상실이 겹쳐지는 문학적 정점으로,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의 경계를 아름답고도 슬프게 그려낸다.
3. 성인기 - 교도관의 길, 인간과 사회에 대한 성찰
서른 무렵 교도관이라는 직업을 선택한 작가는 홍성교도소에서 첫 발령을 받으며 직업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단순히 생계를 위한 선택이었으나, 점차 그는 교정 현장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눈을 키우게 된다.
7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면서 교정 간부로 승진한 그는 이후 여러 교도소를 거치며 다양한 수인들과 마주한다. 재소자들에게서 악의를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적인 고통과 그리움을 보게 되는 순간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때부터 그의 수필은 단순한 회고록을 넘어 인간 이해의 문학으로 확장된다.
서울구치소에서의 근무는 특히 상징적인 경험으로 자리 잡는다. 면회 오는 가족들이 들판에서 쑥을 뜯는 장면이나, 정적 속에 달빛이 비추는 교도소 풍경 등은 구치소라는 공간에 따뜻한 인간애를 입혀준다. 억압된 공간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며, 그 안에서도 꽃은 피어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4. 신앙과 문학의 결합 - 사형수의 발을 씻기며
《서울구치소의 바람》 수필집에서 가장 큰 감동을 주는 대목은 사형수의 발을 씻기며 함께 눈물 흘리는 장면이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실천을 넘어,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연민과 회복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한때 살인을 저지른 사형수가 발을 맡긴 채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작가는 신앙인으로서의 사랑과 교도관으로서의 연민을 동시에 실현한다. 반복되는 족욕 의식을 통해 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인간과 그것을 바라보는 타인의 마음이 교감하는 이 순간은, 문학이 전달할 수 있는 최상의 감정선에 도달한다.
작가는 이 장면을 통해 인간은 모두 죄인이며, 사랑으로 용서받고 변화할 수 있음을 고백한다. 이때 교도관과 사형수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오직 인간 대 인간의 관계만이 남는다.
5. 인생 전체에 깃든 문학적 성찰
임재문 작가의 수필은 단지 삶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돌아본 발자국에 의미를 새겨 넣는 작업이며, 사유의 그물망 속에 정직한 감정과 깨달음을 길어 올리는 문학이다.
그의 문장에는 과장이나 꾸밈이 없고, 체험한 바를 있는 그대로 풀어내되 그 안에 따뜻한 시선과 묵직한 서정이 자리한다. 그는 수인에게도, 고향의 기억에도, 그림 속 노인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투영하며, 독자로 하여금 함께 공명하게 만든다.
그의 수필은 신앙과 문학, 공직과 인간애, 상실과 회복이라는 키워드를 하나로 엮어내며, 독자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 수필집은 단지 한 작가의 회고록을 넘어서,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정직한 증언이자, 고통과 사랑을 통과한 삶의 진실한 문학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