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지는 마음, 사랑
어느 날 갑자기 다리에 힘이 없다고, 어딘가 이상하다고 말하며 스르륵 쓰러진 아내. 의사는 유방암 수술 이후 암세포가 척추로 전이되어 신경을 눌렀다고 했다. 희망만을 바라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두 사람은 좌절하지 않았다. 긴 시간 병원 생활을 하면서도 남몰래 웃음 가득한 둘만의 추억을 쌓아갔다. 아내를 태운 휠체어를 밀다가 뒤에 매달려 경사로를 내려가기도 하고, 재활을 마치면 병실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사서 나눠 먹었다. 장난기 가득한 세상 연인들이 그렇듯이 ‘함께’라는 이유로 현실의 절망을 이겨내려 노력했다. 아내가 두 번의 수술과 재활, 항암을 견디는 동안 남편은 언제나 아내의 다리가 되었다. 아내의 머리를 감기고 몸을 씻기고 집 청소와 요리 등 살림을 도맡으며 능동적으로 움직였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홀로 남을 남편을 위해 아픈 가운데에서도 생필품을 미리 주문해 두는 마음 씀씀이를 보인다. 끝까지 서로를 책임지려는 모습에서 사랑의 또 다른 형태를 읽는다.
돌봄의 온기
어쩔 수 없이, 다른 대안이 없어서 돌봄을 억지로 떠안는 사람들은 보통 누군가를 챙기면서도 감정적으로 거리를 둔다고 한다. 실제로 노년기에 아픈 아내를 돌보았던 남편 사례를 해석한 결과를 보면 이렇게 의무감에 돌봄을 받아들인 남편은 따뜻한 보살핌이 아닌 관리형ㆍ의무형 돌봄을 아내에게 제공했다. 하지만 노문성 씨는 말한다. 아픔은 아픈 사람의 몫이지만 그 책임을 나눠질 유일한 관계는 부모와 부부라고, 그렇게라도 사랑하는 이의 고통에 참여할 수 있다면 감사한 일이라고. 남편 노문성 씨는 그런 마음으로 아내 박선영 씨의 돌봄을 받아들였다. 《그리움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에서는 돌봄의 온기를 생각하게 하는 다양한 장면이 등장한다. 서로를 믿고 신뢰하며 살아온 부부만의 노련한 호흡이 돋보인다.
70세, 여성의 서사를 다시 읽다
‘할머니 두 분, 어머니 그리고 아내… 집안을 잘 보살피고 지탱해 준 이 여성들의 힘으로 나는 복되게 자랄 수 있었고 더불어 내 가정의 소중함도 배웠다.’ 1956년생 노문성 씨는 아내를 보내고 홀로 글을 적어 내려가며 자신이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이 거저 이뤄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어린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따뜻함과 안온함 속에 머물 수 있었던 건 자신을 사랑하고 지켜준 여성들 덕분이었음을 고백한다. 부모와 형제자매, 아내, 아들과 딸, 딸이 이룬 새로운 가정과 손주 등 삼대를 돌이켜 보며 자신을 둘러싼 여성들의 서사를 되짚는 장면들이 새삼 감동으로 다가온다. 동시에 먼저 떠난 아내 박선영 씨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그녀의 모든 것들이 궁금해진다.
슬픔과 그리움이 희망이 되기까지
노문성 씨는 슬픔과 우울을 이겨내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지만 이 책 《그리움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후반부로 갈수록 커다란 희망에 가 닿는다. 이 땅에서 삶을 마무리하면 두 사람은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사이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천국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다. 남편 노문성 씨는 아내처럼 신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기점으로 신께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간 게 보인다. 다시 만날 희망이 있기에 그는 구차하거나 초라하지 않게, 욕심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아내에게 전할 이야기를 열심히 모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