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 조형근 추천
참전군인을 만나러 간 사람들
그들이 들은 할아버지들의 오래전 전쟁 이야기
이 책은 평화단체 ‘아카이브평화기억’의 시민참여형 구술활동 ‘참전군인을 만났습니다’에 씨앗을 두고 있다. 오랜 시간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의 진상규명 운동’을 해 온 평화활동가 석미화는 참전군인을 가해의 자리에 머무르게 두는 한국 사회에 대한 저항과, 평화로의 새로운 모색을 위해 평화단체 ‘아카이브평화기억’을 열고 베트남전쟁 참전군인을 만나는 활동을 시작했다. 참전군인과 시민 사이의 만남을 주선하며, 개인의 기억을 사회적 기억으로 확장하고 공론화하는 운동을 벌여왔다. 이 책은 평화활동가와 시민, 학생과 예술가, 참전군인2세 등 평화의 자리를 모색하는 다양한 이들의 기록과 참여로 만들어졌다.
이 책을 통해 이야기를 들려준 참전군인은 여섯 명이다. 가난한 시절, 입하나 줄여 보려고 참전을 선택한 말년 병장 운전병, ‘남자’다움을 강조하며 해병대에 지원했다가 참전으로 큰 부상을 입은 첨병, 의무부대 소속으로 베트남 사람들에게 대민지원을 다닌 치위생 하사관, 경력 쌓으려고 참전을 지원한 군 장교 등 다양한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들은 베트남전쟁이라는 공통 배경이 있지만 생각과 사건, 증상과 인식은 다 다르다. 병사와 장교, 해군과 육군 등 위치와 경험이 다른 이들의 삶속에는 4·19 혁명과 5·18민주화운동, 김신조 사건과 경부고속도로, 부정선거와 관제 데모 등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이 배경처럼 등장한다. 인식하지 못한 채 역사에 휘말린 개인들의 이야기는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중동 파견 노동, 학생운동과 베트남전쟁에서의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운동, 고엽제 피해와 참전명예수당 등으로 이어진다. 할아버지들의 옛이야기 같기도 한 이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 위기와 군대식 조직 문화, 가부장적 사회 구조의 폐해와 젠더 갈등, 세대 갈등을 조망할 수 있는 여러 단서를 제공한다. 한편, 국가주의와 가부장제가 남성성을 어떻게 조정하는지, 또 전쟁을 수행한 이들은 국가와 군대, 가부장제 문화에 대해 어떤 인식과 오해, 왜곡과 모순을 드러내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참전군인 2세, 가족을 현충원에 묻은 유가족
우리가 외면해 온 슬픔과 분노, 지금도 진행중인 전쟁 피해와 고통
이 책의 기록자이자 구술자이기도 한 이재춘은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는 연구자이다. 또한 고엽제 후유증으로 사망한 참전군인의 아들이자, 고엽제 2세 피해로 추정되는 뇌병변 증상과 징후를 지니고 있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0년 뒤 어느 날, 응급실에 실려갔다. 10살 전후부터 머릿속에 종양이 생겨났을 거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 책을 통해 그는 아픈 몸과 베트남전쟁, 고엽제 피해 2세로서의 증명과 증명받을 수 없는 현실, 연구자이자 베트남전쟁에 강하게 연루된 이로서의 인식과 갈등, 슬픔과 전망을 담담히 들려준다.
이 책에는 유가족 강성오의 이야기도 실려 있다. 그는 베트남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동생이 현충원에 묻히자, 50여 년 동안 해마다 여러 차례 현충원에 드나들었다. 그는 동생의 죽음에 관해 아무런 설명도 위로도 받지 못한 채 동생의 유골함을 받았던 기억과 그 죽음에 관한 질문이 아직도 해소되지 않은 이유를 들려주며, 죽음 이후에도 비석 하나 마음대로 쓸 수 없게 하는 국가와 군대의 차별 등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다.
참전군인을 가해의 자리에 머물게 하지 않고
이야기의 자리로 초대하는 마음
전쟁에 관한 국가 중심의 편협한 서사와 납작한 시선을 부수고
전쟁 기억과 폭력의 경험을 평화 지렛대로 삼고 싶은 희망과 도전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은 참전군인의 이야기를 듣기로 한 이들이다. 이들은 전쟁을 수행한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부대끼며, 스스로가 가진 기대와 편견을 마주하고, 한숨과 질문, 갈등과 도전이 뒤범벅되는 시간을 건너오기도 했다. 듣는 이들은 스스로의 위치와 자리를 변화시키거나 거리 두기를 조절하며 때로는 듣기에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한다.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을 깨고 전쟁을 듣는 것은 가능한가? 구술자와 기록자 사이에 발생하는 위계를 깨트릴 수 있는가!‘ 분투하면서도 한국 사회에 이 만남을 제안한다.
참전군인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그들이 가담하게 된 전쟁과 폭력에 서사를 만들거나, 양심적 증언자의 자리로 초대하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책임을 가난한 시절이나 박정희 정권의 폭력과 기만 탓으로 두지 않고, 그들을 국가주의와 가부장제에 의해 희생된 수동적인 개인으로만 바라보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참전군인과 함께 계급과 민족, 병역과 군대, 세대와 역사, 가족과 젠더에 관한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를 똑바로 마주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