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아글리에타의 화폐 연구를 집대성한 책
미셸 아글리에타는 프랑스 제도주의 화폐 이론을 주도한 학자이다. 통상 우리나라에서 그는 1976년에 출간된 『자본주의의 조절과 위기』와 이 책을 바탕으로 형성된 조절 이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1982년 앙드레 오를레앙과 함께 화폐에 대한 주류 경제학뿐만 아니라 마르크스 경제학과도 인식론적 단절을 시도한 『화폐의 폭력』을 발표하면서 화폐 이론가로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2016년에 발간된 『화폐: 부채와 주권 사이의』는 『화폐의 폭력』이 출간된 이래 제도론적 관점과 조절 이론적 관점에서 아글리에타가 35년 동안 수행해 온 화폐에 대한 연구를 집대성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화폐라는 수수께끼를 풀어 나가다
화폐는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에게조차도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아글리에타는 이 책에서 인류학, 역사학, 정치철학, 정치경제학 분야와의 다학제적 또는 학제 간 접근을 통해 화폐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긴 여정을 시작한다. 아글리에타는 순전히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화폐의 기능을 계산단위, 교환의 매개, 그리고 가치의 저장 수단으로 단순화하는 화폐에 대한 도구적 접근 방식을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 화폐는 물물교환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인간의 발명품이 아니다. 아글리에타에게 있어 화폐는 경제 분야를 훨씬 넘어서는 가장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매개하는 보편적인 사회 제도이다. 화폐는 시장에 우선한다. 논리적으로 화폐는 시장보다 더 근본적인 사회적 관계로서 시장 관계 이전에 존재한다.
인류학의 오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수렵-채집 공동체를 제외한 모든 사회에서(즉 그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든, 국가를 형성하든 아니든, 대부분의 사회에서) 화폐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화폐는 단순히 교환의 매개 수단이 아니라 시장이나 국가의 유무에 관계없이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매개하는 초역사적이고 보편적인 제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글리에타는 자본주의 사회뿐만 아니라 화폐의 흔적을 갖고 있는 광범위한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화폐 이론을 제시한다.
한편, 신고전파 경제학에서 화폐는 무시되거나 기껏해야 중립적이고, 상품 간의 상대가격만이 중요하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이나 금융 위기를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글리에타에게 화폐는 사적으로 무한히 전유하려는 대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모든 욕망의 대상을 측정하는 공통의 준거로서 공공재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화폐의 양가성은 화폐에 대한 신뢰의 붕괴로 인한 금융 위기와 화폐 위기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아글리에타는 이 책에서 “화폐는 주권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국가의 창조물이 아니다. 하지만 화폐는 국가와 긴밀한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쓰고 있다.
달러화에 기초한 기축통화 시스템을 넘어서
마지막으로 아글리에타는 현재의 달러화에 기초한 기축통화 시스템이 지속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한다. 아글리에타가 보기에 현재의 준-달러 본위는 관성, 대안의 부재, 그리고 금융 지배가 미국에 가져다주는 이점 때문에 지속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달러라는 기축통화의 헤게모니가 퇴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금융 지구화의 후퇴를 막고 대칭적인 국제 화폐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IMF의 정치적 권한을 대폭 강화하고 SDR(특별 인출권)의 발행을 대폭 늘리는 등 새로운 국제 화폐 레짐을 조직할 필요가 있다고 아글리에타는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