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는 사물 속에
감춰졌던 이야기
저자는 사물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을, 고요한 관찰과 성찰의 글쓰기를 이어 간다. 그는 사물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대상에 깃든 속성과 감각, 이야기를 고스란히 책에 담았다. 통기타의 울림 속에서 떠오른 외할머니의 다정한 목소리, 거친 사포로 연약한 물체를 갈며 얻은 통찰, 명패가 떨어진 현관문에서 느낀 사회의 위태로움, 댓글 창 너머의 불안과 기대…. 저자는 사물에 얽힌 물질적인 특성을 넘어 인간관계, 감정, 기억, 시절까지도 포착한다.
말없이 놓여 있을 뿐인 사물. 하지만 그 침묵의 내면엔 삶에 대한 수많은 암시와 사유의 길이 숨어 있다. 『사물을 보는 방식』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물에 담긴 감정과 기억, 철학과 태도를 펼쳐 보인다.
살다 보면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마음을 채울 때가 있다. 우리가 미처 이름 붙이지 못했던 감정이나 설명하기 어려웠던 순간들. 이 책은 그런 낯익지만 흐릿한 감정의 결을 또렷하게 그려준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이 책이 ‘감정’보다는 ‘태도’로 써 내려간 글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지나친 자기 고백이나 결핍, 연민에 기대지 않는다. 대신 꼼꼼하고 세심한 시선으로 사물과 사람, 공간과 시간에 깃든 생의 실마리를 놓치지 않고 읽어낸다. 덕분에 읽는 이도 저자의 글을 통해 자신의 삶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피노누아 : 그가 사물을 보는 방식
와인을 만드는 포도 품종 중 하나인 피노누아는 다루기 어렵기로 유명하다. 껍질이 얇고 병충해에 취약하며, 온도와 토양, 바람까지 민감하게 타는 탓에 재배 자체가 큰 도전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연약함을 무릅쓰고 정성껏 길러냈을 때, 피노누아는 다른 어떤 품종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고급스러운 풍미와 깊은 여운을 선사한다. 예민하지만 매혹적이다. 한때 미국에서는 이 품종이 자랄 수 있는 땅을 찾기 위해 전국의 토양을 뒤집어본 적도 있다고 한다.
좋은 피노누아는 단순한 향미를 넘어,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균형’을 선사한다. 타닌이 과하지도, 산미가 튀지도 않지만, 맛과 향의 조화로움이 최상의 품질을 끌어내며 오래도록 기억된다.
작가 온정의 글을 읽으며, 나는 종종 피노누아를 떠올렸다. 저자의 문장은 과하지 않다. 감정을 함부로 밀어붙이지도 않고, 메시지를 억지로 강조하지도 않는다. 대신 차분히 사물과 세계를 바라보며, 감정과 의미를 자연스럽게 전한다. 딱 좋은 균형. 그가 써 내려간 글은, 피노누아처럼 맛이 편안하며 여운이 깊다.
포도를 길러내는 환경을 ‘떼루아’라 부른다.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땅과 공기, 햇빛과 바람의 결 모두가 중요하다.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출판인으로서 나는 과연 그에게 좋은 떼루아가 되어주었을까. 저자가 정성껏 써 내려간 문장들이 이 책 안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단단한 형태로 전달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