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문제의식
미국 역사의 독특함을 꼽아보자면, 무엇보다 영국의 13개 식민지가 모국에 반란을 일으켜 혁명에 성공했다는 점, 세계 최초로 민주공화국을 세웠다는 점, 그리고 연방제라는 특이한 정치체제를 수립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건국 당시 천부인권을 내세웠으면서도 노예제를 인정했고, 남북전쟁이라는 유혈 과정을 통해 그 폐지에 이르렀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그러나 미국 흑인들은 노예제가 폐지된 후에도 노예노동의 대가를 보상받지 못했고, 완전한 시민으로서 법적 지위를 갖추기까지는 해방 이후 백 년이 걸렸다.
이 책은 이러한 인종적 몰이해의 배경 아래 놓여 있는 역사 유산에 대해 지리적ㆍ공간적 시야를 확장해 그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봄으로써 미국 인종 문제의 근원적 배경과 양상을 추적한다는 목표 하에 기획되었다. 저자는 미국의 인종차별에 대해 집단적 편견이 법적 권위와 제도적 통제의 힘으로 뒷받침될 때 생기는 구조적 문제임을 지적하면서, 인종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인종적 편향의 내면화, 즉 인종적 사회화의 구속력에 주안점을 두고 서술을 이어나간다. 무엇보다 미국의 인종 문제는 흑인의 문제가 아니라 백인이 흑인에 대해 가해자로서 만들어낸 문제다.
또한 이 책은 사회적 구성물로서 백인성의 구축에 주목하면서 노예제와 인종 테러의 유산에 한정되지 않는 아프리카계 아메리칸의 경험의 폭과 깊이를 드러낸다. 책에서 백인의 사회화, 백인우월주의의 내면화 그리고 인종 체제와 그에 가담하는 백인의 방어적 반응 행태들에 대해 비판적인 분석을 이어가는 건 문제 해결의 시계추를 옮기는 인식의 전환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전 지구적 최강자를 차지하면서도 인종이 핸디캡이나 혜택이 아니라는 것을 국가가 보장하지 못하고 제도적인 인종차별의 병폐들을 개선하지 못한다면, ‘인종적 타자’에 대한 증오를 방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블랙 아메리카와 블랙 디아스포라
‘블랙 아메리카’란 아프리카인들이 신대륙으로 건너온 노예무역 시기부터 미국 흑인들이 자유와 평등의 여정을 전개한 곳을 지칭한다. 제1장 ‘블랙 아메리카의 기원’에서는 아메리카의 원주민에 대한 유럽인들의 초기 인식을 살펴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아메리카 식민 과정을 두 인종의 상호 관계에 주목해 서술하고, 이후 아프리카인들을 서인도와 아메리카에 노예로 실어오면서 전개되는 세 인종의 대결과 위계의 장면들을 고찰한다. 북미에 백인 식민지인들이 도착하기 이전 아메리카 원주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것이 식민 사회 초기 형성에 미친 영향 등에 주목하면서 블랙 아메리카 형성의 배경이 되었던 세 인종의 교차를 기술하는 것이다. 이는 경제적ㆍ사회적ㆍ정치적 기회에 대한 우월적 접근권을 갖는 ‘백인성’이 등장하기 이전 아메리카 사회를 되짚어봄으로써 인종이 문제가 되어가는 기제를 밝히려는 의도에서다.
제2장 ‘블랙 디아스포라’에서는 아프리카인의 이산과 대서양 횡단의 과정을 추적하면서 특히 흑인 선원들이 남긴 기록을 중심으로 그들의 유동성을 살펴본다. 예컨대 폴 길로이(Paul Gilroy)는 아프리카 고향에서 쫓겨나 대서양을 횡단하고 아메리카, 서인도, 유럽에 정착한 흑인들의 공통 경험을 들어 그들을 ‘대서양 흑인’으로 정의했는데, 아프리카에서 서인도와 아메리카에 노예로 잡혀온 흑인들이 낯선 환경에서 다른 흑인들과 크리올(Creoles) 언어로 소통하며 분리 경험을 극복하는 과정을 살펴나간다.
노예제와 블랙 코즈모폴리터니즘
제3장 ‘노예제와 미국의 건국’에서는 영국 식민지에서 노예제가 정착하는 과정을 서인도와 남미의 노예제 양상과 비교하여 고찰하고, 이어서 블랙 아메리카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던 미국 혁명기에 건국의 아버지들이 전개한 노예제 담론을 통해 건국의 유산을 되짚어본다. 혁명기 지도자들은 새 국가가 동등한 지역들의 연합이며 노예제는 연방의 간섭을 받지 않고 유지될 것에 합의했는데, 이 과정에서 노예들의 해방보다는 공적 안전과 ‘인종적 질서’가 더 중요하다고 봄으로써 혁명의 자유주의 이념에 내포된 인종주의적 속성이 드러난다.
제5장 ‘카리브해의 블랙 코즈모폴리터니즘’에서는 아이티 독립전쟁이 불러일으킨 흑인 정체성의 변화를 코즈모폴리터니즘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카리브해와 대서양을 오가던 ‘대서양 흑인’들은 ‘국가’를 원하거나 기대하지 않고 때로는 포기하고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코즈모폴리터니즘의 특성에 가까웠다. 서인도와 미국에서 자신의 출생지를 떠나 새로운 이주를 감행한 흑인들에게 국가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찾으려던 새로운 정착지와 거주지에 대한 청사진은 어떤 것이었는지 블랙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시각으로 살펴본다.
“40에이커의 토지와 노새 한 마리”
제7장 ‘재건기 남부 흑인의 기회와 성취’ 및 제8장 ‘스펙터클 린치와 백인성의 구축’에서는 재건기에 주목해 건국이념의 전환을 위한 시도와 한계를 살피고, 남북전쟁 이전뿐만 아니라 재건기 이후에도 인종분리와 인종차별의 유산에 북부가 공모한 양상을 주목해 서술한다. 남북전쟁 이후 재건 시기는 제2의 건국이라고 칭할 만큼 미국 건국이념의 대전환을 이룬 시기였다. 헌법 수정조항들이 제정되어 노예제가 폐지되고, 해방된 흑인들에게는 시민권과 투표권이 주어졌다. 흑인들은 생애 최초로 선거권을 행사했으며, 주 의회를 비롯해 연방의회 등 여러 공직에 정치인들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저 “40에이커의 토지와 노새 한 마리”를 기대했던 해방 노예들은 실질적 독립에 필요한 경제 지원을 받지 못함으로써 소작농이나 임금농으로 묶이는 처지가 되었고, 북부 도시들로 이주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모색해야만 했다. 재건 정부는 2백 년 노예제의 유산을 바로잡고 인종 평등을 수립하기엔 그 힘이 너무 미약하고 단명했다. 결국 인종차별에 대한 법적인 보호 장치 마련도 주 정부 역할로 떠넘겨버린 채, 재건 정부는 짧은 군정의 막을 내리고 만다. 1877년 공화당의 타협은 남부에서 인종 분리를 합법화하는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s)의 제정과 문자해독능력 등을 조건으로 흑인 투표권을 박탈하는 역사의 퇴행을 초래했다.
따라서 이 장들은 남부에서 흑인 린치를 방치하고, ‘백인성’이 지배하는 100년여의 짐 크로우 시대를 여는 데 동조해버린 북부의 책임까지 검토한다. 사실 노예제는 남부만의 유산이 아니라 북부가 공모한 협조 체제였다. 블랙 아메리카의 역사에서 유의할 점은 노예제와 인종주의를 남부의 죄업으로만 돌리는 것이다. 남북전쟁 후에 남부 연합과 노예제에 대한 처벌과 반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이후 그 유산이 지속된 것은 남부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북부가 함께 동조한 결과였다.
글로벌 블랙니스와 인종적 전망
제9장 ‘20세기 흑인의 민권 투쟁’과 제10장 ‘블랙 아메리카와 인종의 유산’에서는 현대 블랙 아메리카의 현실과 미래 전망을 다룬다. 20세기 들어 미국 흑인들은 재건 이후 제정된 짐 크로우 법의 폐기를 시도하는 한편,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를 설립해 흑인 민권 회복에 박차를 가했다. 1954년 브라운 판결(Brown v. Board of Education)로 공교육에서 인종 분리가 금지되고, 1965년 민권법으로 남부 흑인의 투표권도 회복되었다. 하지만 흑인들에게 평등한 교육 기회는 제공되지 못했고, 주거 지역도 인종 분리된 데다가 신용 혜택에서 불리한 차별까지 받으면서 흑인 실업률과 범죄율은 높아만 갔다. 차별 시정 법안(Armative Action)이 제정되어 흑인과 소수 집단의 교육과 고용 기회를 확대하는 조치가 취해졌지만, 백인들이 다시 역차별이라는 소송을 제기해 일부 주에서는 대학 입학과 고용 차원에서 소수집단에 일정 비율을 배분해야 하는 조치마저 폐지되었다.
하지만 최근 미국 흑인들은 노예제 보상 운동을 벌이는 한편, 전 세계 아프리카 후손의 다양성을 포섭해 인종주의의 억압에 맞서는 ‘글로벌 블랙니스(Global Blackness)’를 추구하고 있다. 이는 흑인민족주의 혹은 아프리카중심주의를 넘어 디아스포라를 통해 형성된 아프리카 이산민의 연대를 강조하며, 동시에 인종의 위계가 계급의 위계로 지속되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모색한다. 이 책의 제9장과 결론을 대신하는 제10장에서는 인종의 위계가 계급적 질서와 연계되어 전개된 과정에 주목하면서 블랙 아메리카의 향후를 전망해보는 것으로 구성된다. 다른 지역과 비교해 독특한 인종 정의(定義)를 보이는 미국에서 계급적 소속감보다는 인종 집단에 대한 연대감과 감수성이 더 높은 특성을 보이는 배경, 그리고 경쟁적이고 위계적인 질서 속에서 사회적 낙인 대상이 되어온 아프리카계 아메리칸이 흑인 정체성에 대해 전개해온 논의들을 정리하고, 미래 미국 사회에 대한 인종적 전망을 담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