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반목과 갈등은 여전히
공감의 ‘부족’이 아니라 공감의 ‘과잉’ 때문이다
《공감의 반경》개정증보판은 초판이 출간된 후 3년 동안 공감의 과잉으로 인한 갈등과 분열이 나아진 것이 아니라 더 심해졌다는 비극적 사실에서 출발한다. 저자 장대익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장 교수님, 《공감의 반경》을 흥미롭게 읽고 있어요. 최근 우리나라 정치 갈등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올해 나온 책 맞죠?”
“아…… 아니에요. 그 책은 3년 전쯤 출간되었어요. 올해 나온 책이라 느끼셨다면 아마도 우리 사회의 갈등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하하.”
멀리 갈 것도 없이 2024년 12월 3일 초유의 비상계엄 사태는 내집단을 편애하고 외집단을 혐오하는 공감의 과잉이 극한으로 치달은 사건이다. 한 국가를 이끌어야 할 지도자가 부정 선거 음모론에 심취해 반대측의 입을 막고 폭력을 행사했다. 유튜브 채널들은 혐오를 연료 삼아 가짜 뉴스를 퍼뜨리며 자기편을 모았다. 전통 언론 역시 사실 검증과 중립적 보도를 포기하고 당파적 입장에 따라 혐오를 재생산했다. 모두가 너는 누구 편인지를 따지는 데 몰두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런 혼란을 없애려면 ‘공감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저자 장대익은 이런 해법이 불편하다. 그는 다시금 한국 사회에서 가장 과잉된 감정은 공감이라고 잘라 말한다. 자신과 입장이 같은 사람에게만 작동하는 감정적인 공감 말이다. 우리에게 부족한 건 공감이 아니다. 문제는 공감의 ‘반경’이 협소하다는 사실에 있다. 다시 말해 느낄 줄 아는 능력을 넘어 타인의 입장이 되어 보는 역지사지를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느냐다. 장대익은 아직도 우리가 공감의 반경을 확장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이 개정증보판을 썼다. 그에 따르면 공감은 구조이고 선택이며 설계할 수 있는 인지적인 태도이다. 공감의 반경을 확장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물론 인류의 미래는 암울하다. 이에 저자 장대익은 ‘교육’과 ‘정치’라는 인간 생활의 가장 중요한 두 축에서 어떤 변혁이 일어나야, 어떤 구조가 정착되어야 남의 입장이 되어 보는 인지적 공감을 확장할 수 있는지, 어떻게 내가 당신에게로 다가갈 수 있는지 치밀하게 탐구한다. 《공감의 반경》의 문제의식은 2025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내 새끼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대를 위해 공감을 교육하기
소설가 김훈이 지적한 ‘내 새끼 지상주의’는 대한민국의 시대 정신이 됐다. 자녀의 어떤 고통과 불편도 참지 못하는 부모의 간섭과 보호는 타인의 입장을 헤아리는 인지적 공감을 배울 기회를 빼앗는다. 하지만 저자 장대익은 인간이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인간을 비롯한 영장류는 원래 ‘온 마을이 나서서’ 아이를 키우는 협동 양육 체제였다. 협동 양육은 대행 부모가 어린 아이들을 돌보고 부양한다. 대행 부모는 할머니뿐만 아니라 손위 형제자매, 이모, 이모할머니, 아버지, 삼촌, 심지어 이웃 집단에서 온 방문객 등 여성의 출산과 자식의 생존 가능성을 돕는 모든 존재이다. 진화생물학자 세라 블래퍼 허디에 따르면 10만 년 전만 해도 지구를 구석구석 훑어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던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를 뒤덮을 만큼 드라마틱하게 확산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협동 번식의 진화이다. 그러나 출산과 양육이 각자도생이 되면서 내 새끼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 혼자서만 아이를 키우는 게 아니라는 작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부모는 물론 아이에게도 타인의 존재를 지우는 나쁜 결과를 불러왔다.
따라서 “내 아이를 소중히 여기듯 타인의 아이에게도 마음을 열 수 있는 사회적 전환”이야말로 아이의 미래를 위해, 인류의 지속을 위해 필요한 기초다. 저자는 다양한 과학적 근거를 동원해 부모의 통제적 양육은 아이의 성격과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부모는 자신의 영향력이 가진 한계와 자녀의 삶을 보호할 수 있는 범위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자녀에게 영혼의 집까지 줄 수는 없다.’ 또한 저자는 아이들의 선천적 개성을 존중하고 운동과 스포츠를 통해 타인과 활발히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호기심을 증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방법이 공감의 반경을 얼마나 극적으로 늘릴 수 있는지를 여러 증거를 통해 보여준다.
교육과 공감의 반경을 논의하는 개정증보판에서 가장 중요한 주장은 ‘대학의 거대한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른바 ‘입결’을 통해 대학의 서열화에만 몰두하는 우리 대학은 평가를 둘러싼 이런 부작용은 대학의 존재 이유 자체를 뒤흔들고 있다. 대학은 “학생의 성장과 행복, 창의성과 공감 능력, 기업가 정신의 함양, 지역사회 기여”라는 궁극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학생 개개인의 성장보다 선발에만 집중하는 현 세태에서 타인의 자리에 서보는, 현실의 문제를 발굴하고 해결하려는 모험가적 인간은 나올 수 없다. 저자는 대학의 거대한 전환이란 도전하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는 청년을 기르는 ‘기업가적 전환’이라고 칭하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를 제도적으로 논의한다.
감정의 정치를 넘어
사고의 공동체를 조직하는 정치
인간은 편향된 동물이고 이런 편향은 즉각적으로 강력한 감정에 기반을 둔다. 따라서 서로의 이해관계를 조율해야 하는 정치에서는 이성과 인지적 공감의 발휘보다는 감정적 갈등과 내집단 편향이 만연하다. 우리의 과제는 감정의 정치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도자는 그 감정에 안주하는 것 아닌가? 지도자가 자신만이 옳다는 도덕적 편협과 아집에 빠지고 이를 부추기며 시야를 더욱 좁히는 지지자에 둘러싸인 채 엉뚱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공동체의 존립마저 위협하는 심각한 사태다. 어쩌면 12.3 비상계엄 사태를 촉발한 원인 중에 하나도 이런 감정적 아집이었을지 모른다.
사고의 공동체를 조직하려면 정치는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지식을 활용해야 한다. 사람 간의 관계와 정치적 문제에서 갈등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 인간의 편향은 우리 사회의 기본 조건이다. 사고의 공동체는 이 기반 위에서 시작된다. 예를 들어 능력이 비슷한 두 조직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심리적 기제가 있느냐에 따라 장기적으로는 성과가 달라진다. 그런 요인 중 하나라 ‘심리적 안전감’이라는 것이 있다. 실수를 해도 비난이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조직 내에 있다면 구성원들은 제각기 자신의 잠재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바로 이 심리적 안전감이 실종된 사회다. 저자는 12.3 비상계엄 같은 초유의 사태가 대통령 한 사람만의 독선만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이런 결정에 제동을 걸어야 할 권력의 중추가 그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지 못할 정도로 심리적 안전감이 전무했을 수 있다. 결국 권위와 침묵이 아니라 신뢰와 대화가 있는 조직이 공감의 반경을 타인에게로 넓힐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갈등을 해소하는 화해의 첫걸음이다. 저자는 인간에게는 갈등 본능만큼이나 화해 본능도 있다고 역설한다. 갈등 이후에 화해하는 능력이 없었다면 인류는 진작에 멸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집단 사이에 파인 골을 메우려면 우리는 자주 만나야 한다. 단, 심리적 안전감을 기초로 하여 공동의 목표를 만들어야 한다. 북아일랜드의 ‘성금요일 협정’이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 무려 30년간 구교계와 신교계의 유혈 충돌로 3600명이 사망하고 부상자가 5만 명 이상 나온 북아일랜드에서 분쟁을 종결할 협정을 체결했다(1998년 4월 10일). 그 후 양쪽 진영 청소년은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정기적으로 문화 교류와 봉사 활동을 함께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점진적으로 서로를 적이 아닌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화해는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