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내 이름은 은비예요. 잊어버리면 안 돼요!”
“걱정 마래이. 은비 기억은 꼭꼭 챙겨 간데이.”
은비는 오늘도 유치원에서 돌아와 할머니 옆에 붙어서 영어 공부를 시작해요. 할머니도 모르는 게 있다니 어쩐지 은비는 신나요. 한편, 할머니도 이 시간을 기다려요. 그렇게 외우기 힘든 ABC도 은비가 알려 주면 곧잘 말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사이좋은 할머니와 은비에게 큰일이 생겼어요.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게 된 거예요. 할머니는 은비에게 괜찮다고 다독였지만, 병원 생활이 길어지고 부모님의 얼굴이 어두워졌어요. 할머니는 점점 기억을 잊어버리는 일이 많아졌고요.
“은비야 미안테이. 할매가 요즘에 기억을 다른 데로 조금씩 옮기고 있데이.
이사 비슷한 건데 걱정 마래이. 은비 기억은 꼭꼭 챙겨 간데이.”
“할머니, 다른 나라로 가세요? 그럼 은비가 영어 더 많이 알려 드릴게요. 이사 갈 때 꼭 잘 챙기셔야 해요!” (21~23쪽)
은비는 할머니의 이사를 돕기 위해 더 열심히 영어를 알려 드리기 시작해요. 하지만 할머니는 곧 은비를 기억하지 못하게 되지요. 놀란 은비는 펑펑 울다가 할머니의 말을 떠올려요. 이사 가는 거라고 다정하게 말해 주셨던 할머니. 은비는 할머니의 기억이 무사히 이사할 수 있도록, 소중한 기억들을 쪽지에 적어 할머니에게 선물하지요.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단풍이 예쁘게 물들던 날,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다정하게 웃으시는 할머니의 영정 사진 앞으로 은비가 적어 드린 쪽지가 놓여 있어요. 할머니가 천국으로 이사 가신 거라면 아마 은비의 쪽지를 꼭 챙겨 가셨을 것 같아요. 화창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은비가 할머니에게 인사를 보내요. “굿 바이 그랜마.”
‘굿 바이 그랜마. 그곳에서도 행복하게 잘 지내세요.’
아이의 순수한 시선으로 그려 낸 잊지 못할 ‘이별’의 여정!
《할머니의 이사》는 아이들의 마음으로 그림책을 만드는 허아성 작가의 작품입니다. 이 그림책에는 점차 기억을 잃어 가는 할머니와 그런 할머니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씩씩한 손녀 은비가 등장합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치매에 걸리거나 몸이 안 좋아지면서 기억력이 떨어지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쓴 허아성 작가도 비슷한 일을 겪으면서 ‘한 사람의 기억이 점점 사라진다는 점이 슬펐고, 그러다 문득 소중한 기억들을 어딘가로 옮겨 둘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작가의 고운 마음이 담겨서인지 《할머니의 이사》에는 할머니와 은비가 서로를 사랑하는 애틋한 마음이 돋보입니다. 할머니는 기억이 점점 흐려지는 와중에 은비에게 ‘기억이 이사 간다’고 둘러댑니다. 은비가 자신의 달라진 모습에 놀라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에서요. 그리고 은비는 할머니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된 뒤에도 ‘기억 이사’를 돕기 위해 매일 할머니를 찾아가 쪽지를 전해 주고 옵니다. 이사 갈 때 꼭 가져가라며 적어 온 쪽지들이 하나둘 늘어가고 할머니를 향한 은비의 마음 역시 소복하게 쌓여 가지요.
허아성 작가는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치매와 죽음이라는 소재를 아이의 시선에서 단순한 선과 색으로 표현해 담담하게 그려냈습니다. 슬픈 이별보다 다정하고 아름다운 이별의 과정이 담긴, 할머니와 손녀 은비의 밝고 명랑한 이야기이지요. 이 그림책의 마지막 장을 펼치면, 할머니의 마지막 시간들이 따뜻한 분홍빛으로 채워질 수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하늘을 올려다보면 기억 이사를 마친 할머니가 우리를 지켜봐 주실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