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에 저항하며 공존ㆍ공생했던
동아시아 비밀결사의 입체적 정체성
천지회의 유산은 이후 역사 과정 속에서 다양한 굴절과 변형을 거치며 오늘날 현대 중국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는 천지회 문제가 적어도 청나라 이후의 중국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천지회 등 비밀결사 이슈는 중국사에서 장기 지속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온 주제다. 이 책은 연구 시기를 청대로 한정해 당시 ‘천지회는 과연 어떤 비밀결사였는가’라는 근본적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천지회의 전설ㆍ의식ㆍ활동을 종합적으로 분석해나간다.
그 수식어인 비밀결사라는 용어 때문에 천지회에는 통상 불법적이고 반사회적이며 반체제적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곤 했다. 그러나 이 책은 그 꼬리표에 내장되어 있던 관성적 의미들을 해체하고, 오히려 이것을 천지회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기존의 연구들과 큰 차별성을 갖는다.
즉, 천지회 활동을 비밀성/공개성의 기준으로 구분해보면, 조직설립 단계에서부터 회원확보ㆍ입회의식 단계까지는 그야말로 비밀성이 보장되는 비밀결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이를 천지회 ‘내부형성의 세계’로 설정했고, 그 결과 자연스럽게 그 이전의 결사 창립과 관련된 부분을 천지회 ‘기원전설의 세계’로, 그 이후의 구체적인 활동 부분을 천지회 ‘외부활동의 세계’로 설정했다. 저자는 이렇게 기원전설의 세계, 내부형성의 세계, 외부활동의 세계 등 세 차원을 천지회의 역사상을 복원하기 위한 결사의 공간으로 설정한 뒤, 그 안에서 조화와 괴리의 정도가 다르게 나타났던 상호부조의 정체성, 반청복명의 정체성, 생존수단의 정체성 등 천지회를 설명하는 세 가지 특징들의 길항관계를 분석함으로써 동아시아 비밀결사의 실체를 새롭게 재조명하고 있다.
이 책의 구성
____제1부 천지회 기원전설의 세계
제1부는 천지회 기원전설의 세계를 분석한다. 먼저 민국시기 이전에 출현한 기원전설의 판본들을 소개하고, 각 판본 간 비교를 통해 그 각색과 변천 과정을 분석한다. 이후 각 판본의 원형이 되는 기원전설의 출현 과정과 기본 구조를 분석한 뒤, 이를 바탕으로 그 형성의 역사적 배경을 추적해본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기원전설이 청대 초부터 건륭 중엽에 이르는 시기의 화남 지역, 특히 천지회의 기원지라고 알려진 복건 남부 민간 사회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으며, 그 기원전설이 천지회 구성원들에 의해 강한 생명력을 지닌 채 각색되고 변천되었던 사실을 밝혀낸다.
기원전설에 대한 비교ㆍ분석은 그 자체로 의미 있을 뿐 아니라 제2부에서 입회의식을 분석할 때에도 유용하게 활용된다. 기원전설은 내용상 일종의 예언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이는 제4부 함풍 4년 천지회 반란의 정치적 배경을 설명할 때에도 다시 언급된다. 이러한 서술은 기원전설이 단순히 천지회의 창립 과정만을 설명하는 전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결사의 정체성을 확립시킴과 동시에 이들의 내부형성과 외부활동의 세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준다.
____제2부 천지회 내부형성의 세계
제2부는 결회(結會)와 입회(入會)를 통해 천지회 내부형성의 세계를 분석한다. 먼저 조직설립 단계에서 보이는 천지회의 조직원리를 살펴봄으로써 이것이 천지회계(天地會系)와 비천지회계(非天地會系)의 회당 비밀결사를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음을 서술한다. 또한 회원모집 분석 과정에서 도출되는 기본 모형이 결사의 조직적 확대와 공간적 확산을 급속하게 초래한 중요 내적 요인이었음을 밝혀내고, 입회의식의 여러 장면들을 소개하면서 그 특징을 정리해본다.
이후 의식과 연극의 관련성에 기초해 그나마 자료가 남아 있는 19세기 말 싱가포르 천지회의 정형화된 입회의식 분석을 통해 의식의 연극적 특징과 의식 절차의 암호화 장치를 고찰하고, 이러한 장치가 어떤 현실적 배경 속에서 배태되었는지 검토한다. 마지막으로 천지회 입회의식의 전반적 기능을 되짚어본다. 이를 통해 연극 형태로 진행되는 천지회 입회의식의 진면목이 환기되고, 결국 ‘조직설립→회원모집→입회의식’이라는 결사의 조직화 과정에 의해 각 지역에서 천지회가 끊임없이 분산적ㆍ독립적으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____제3부 천지회 외부활동의 세계: 출현과 활동
제3부는 건륭 26년 비로소 역사 무대에 등장한 천지회가 각 지역사회에서 끊임없이 조직되면서 성장하고, 그 결과 함풍 4년(1854)에 이르러 광동에서 대반란을 진행하기 직전까지의 과정을 시간 순으로 조감한다.
먼저 건륭 연간 천지회의 특징과 성격에 대해 고찰한다. 핵심은 당시 천지회의 실상이 과연 어떠했는지에 대한 것이다. 가경ㆍ도광 연간 천지회의 활동에 대해서는 유형화 작업을 통해 그 다양한 활동상들을 새롭게 복원해내고, 당시 청조의 국가권력을 위임받은 지방관이 광동을 중심으로 이미 만연화된 천지회의 활동에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대해서도 검토한다. 결국 이러한 상황이 아편전쟁 이후에 나타나는 정치적 불안과 사회경제적 모순의 심화라는 배경 속에서 도광 말엽부터 시작된 천지회의 일상적 봉기를 초래하였음을 설명해낸다.
____제4부 천지회 외부활동의 세계: 대반란
제4부는 천지회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반란으로 평가받는 함풍 4년 천지회 반란을 장기적 시간 축에서 예언과 반란이라는 구도로 다룬다. 우선 이 반란의 배경을 이들의 기원전설에서 보이는 예언과 그 구체적 표현 형태인 전단ㆍ격문ㆍ고시 등의 분석을 통해 풀어나간다. 그리고 이러한 예언을 실천했던 주체로서 ‘진송(陳松)의 천지회 집단’을 설정하고, 이들 집단에 소속된 하륙(何六)ㆍ진개(陳開)ㆍ이문무(李文茂)ㆍ감선(甘先)ㆍ진현량(陳顯良) 등 걸출한 천지회 회수를 중심으로 반란의 전개 과정을 살피면서 이에 대한 지배층의 대응 과정을 함께 분석해본다. 아울러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이러한 천지회의 대규모 반란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도 검토한다.
____제5부 천지회 외부활동의 세계: 재개와 혁명활동
제5부는 함풍 4년 천지회 반란 실패 후, 천지회가 광동에서 활동을 재개한 상황을 살펴보고, 이러한 상황이 손문(孫文)을 중심으로 조직된 혁명단체인 흥증회(興中會)의 무장기의를 가능하게 했음을 고찰한다. 반란 실패로 결사 구성원들이 피해를 입어 천지회 활동에 쇠퇴가 불가피했으리라 짐작되지만, 적어도 광서 연간(1875~1908)에 들어서면 천지회는 그야말로 동산재기(東山再起)한다. 그 재개의 동력을 사회경제적 시각에서 중심과 주변으로 대별해 살피고, 나아가 재개된 천지회의 일상과 특징을 재검토하는 것이 제5부의 골자다. 저자는 19세기 말엽 천지회는 오히려 더 발전하고 있었다고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시기 손문의 초기 혁명활동을 19세기 천지회의 연속적 발전 과정 속에 위치지울 수 있다. 이는 흥중회라는 혁명단체가 무장세력으로서의 천지회를 전략적으로 동원했다는 편향된 관점이 아니라, 천지회라는 전통적 집단과 흥중회라는 근대적 집단을 대등하게 인식하려는 저자의 시각에서 비롯되었다. 그 구체적 실마리는 양자를 각각 대표했던 천지회 회수 정사량(鄭士良)과 흥중회 총리 손문과의 관계에서부터 찾아진다. 이로써 천지회와 흥중회가 서로 대등한 합작을 통해 광주기의(廣州起義, 1895)와 혜주기의(惠州起義, 1900)라는 혁명활동을 전개했음을 확인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