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위기를 넘어, 새로운 체제를 설계하다
1987년, 거리의 함성과 타협의 정치가 함께 만들어낸 헌법은 민주주의의 새로운 질서를 선언했다. 이후 수십 년간 이른바 ‘87년 체제’는 한국 사회의 정치적 기본틀로 작동해 왔다. 그러나 제도가 정착한 후에 문제점들도 축적되었다. 대통령과 국회 권한의 충돌, 사법부 독립성의 한계, 지방분권의 지체 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복합적인 균열을 드러냈다. 2024년 비상계엄 선포와 대통령 파면 사태는 그 한계가 제도 안에서 해결되지 않음을 보여 주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체제 내부의 상호 견제는 작동하지 않았고, 헌법이 위기의 제어장치로 기능하지 못했다.
《87년 체제의 종언과 제7공화국》은 이 격동의 시기에 헌법학자 성낙인 전 서울대 총장이 〈중앙일보〉, 〈한국일보〉, 〈서울경제〉 등 주요 언론에 기고한 칼럼과 인터뷰, 학술행사 발표문을 바탕으로 집필되었다. 1948년 제헌부터 개헌의 역사, 공화국 체제의 변화, 역동적인 정치 현실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봄으로써 87년 체제의 구조적 한계와 성취를 입체적으로 보여 준다. 또한 법학 이론과 현실을 균형 있게 아우르고 다양한 외국 사례도 첨가해 일반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헌의 해법을 제시한다. 나아가 헌정체제를 넘어, 한국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철학, 새 정부의 비전까지 담았다.
헌법학자가 그린 제7공화국의 로드맵
이 책에서 성낙인 전 서울대 총장은 ‘법적 실존주의’와 ‘균형이론’에 기반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헌정 질서의 재구성을 제안한다. “정치권이 나눔의 미학을 실천할 수 없다면, 제도가 먼저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며, 오늘날 위기 극복의 해법으로 정치적 현실과 규범적 이상 간의 균형을 이룬 헌법개정 방향을 제시한다.
저자는 대통령 유고 시 후임 선거, 대통령 형사소추 불가 조항 등 헌법 공백을 지적하며, 정치 갈등이 제도적 허점을 통해 증폭되고 있다고 분석한다. 특히 탄핵소추권, 국무총리 국무위원 해임건의권, 법률안거부권 등의 제도는 정치적 갈등의 도구로 변질되며 헌정 질서를 흔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에 저자는 대통령직선제를 유지하되 국무총리가 일상 행정을 책임지는 절충형 이원정부제 도입을 제안한다. 국회는 양원제로 전환하고, 선거제도는 권역별 비례대표제로 개편하며, 지방분권의 실질화,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성 확보, 시민 참여 확대 등을 병행해야 한다고 본다. 그는 ‘제7공화국’으로 나아가는 것은, 단지 헌법 조문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정치 공동체의 새로운 합의를 만들어 가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헌법, 다시 시민의 삶 속으로
이 책의 저자 성낙인 전 서울대 총장은 권위 있는 헌법학자로서 한국 헌법학을 이끌어 왔다. 25년간 25판을 찍으며 롱런해온 법학도의 필독서 《헌법학》의 저자이며, 한국법교육학회를 만들어 법교육을 대중화하고, 주요 언론에 칼럼을 발표하며 공론장에서 활약하는 실천적 지식인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런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전문적인 개헌론을 시민이 이해하고 향유할 수 있도록 이끈다. 즉, 이 책이 지닌 가장 중요한 미덕은, 헌법을 단지 법률의 최상위 규범으로 보지 않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삶의 원리로 다시 사유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법학자로서의 전문성과 함께,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과정을 오랜 시간 관찰하고 실천해온 지식인으로서, 시민을 향한 언어로 헌정 질서의 재구성을 제안한다.
한국 사회가 맞이한 이 중대한 전환점에서, 우리는 어떤 헌정 질서를 선택할 것인가? 이 책은 단순한 진단을 넘어, 헌법과 민주주의가 다시 우리 삶 속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이끄는 깊은 성찰과 책임 있는 제안을 담고 있다. 시민들과 함께 이 시대를 걸어온 헌법학자의 연구와 실천은, 냉철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개헌 담론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