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없는 찰나에 귀 기울인 철학자,
장켈레비치와 함께하는 여름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1903~1985)는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한 철학자다. 베르그송의 제자로서 시간, 돌이킬 수 없음, 윤리, 용서 같은 주제를 평생 탐구했다. 그는 소르본대학의 도덕 및 정치철학 교수로 재직하며, 지적인 사유만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로서의 삶을 통해 실천하는 철학을 보여줬다.
장켈레비치는 대중적인 철학자는 아니었지만, 철학자 중의 철학자로 불린다. 그는 어떤 ‘주의’에도 속하지 않으며, 삶의 경이와 덧없음, 사랑과 우정 같은 일상적이면서도 본질적인 문제에 천착했다. 특히 그의 사유는 단순한 논리가 아닌 음악처럼 흘렀고, 무엇보다도 “말할 수 없는 것”에 다가가는 시도였다. 철학은 그의 손에서 도그마가 아닌 하나의 윤리적 실천이자 존재의 방식이 되었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 유일한 순간의 철학
장켈레비치 철학의 핵심은 ‘되돌릴 수 없음’이다. 그는 시간을 단순히 흐르는 것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사건들의 연속으로 바라봤다. 그래서 매 순간은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프리뮐팀primultime’의 시간이다. 이 철학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존재 방식을 근본적으로 묻는다.
“당신의 유일한 봄날 아침을 놓치지 마시라”는 그의 말은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다. 삶은 언젠가 끝날 것이며, 그 끝은 예고 없이 찾아오기에, 지금 이 순간, 오늘, 이 대화, 이 만남, 이 선택은 한 번뿐이다. 장켈레비치는 시간의 비가역성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존재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그는 시간의 덧없음이 야말로 삶이 가치 있는 이유라고 말한다. 흘러가기에 아름답고, 되돌릴 수 없기에 소중한 것이다.
철학은 행동이다 - 용기와 사랑의 윤리
장켈레비치에게 철학은 추상적 사유가 아니다. 그의 철학은 언제나 ‘행동’과 연결되어 있다. 도덕, 정의, 감사, 우정, 용서, 그리고 사랑-이 모든 것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살아 있는 실천의 언어다. 그는 나치 점령 하의 프랑스에서 철학자로서 강단에 서는 대신, 저항 조직에 참여했고, 실질적인 행동으로 철학을 증명했다. 그에게 철학은 그저 사유가 아니라, 사랑하는 방식이고,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이다.
그의 도덕론은 전쟁과 부조리, 악과 폭력이 만연한 세계 속에서 질문한다. 무엇이 선인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 악은 정말 소멸될 수 있는가? 그리고 이 질문은 여전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유효하다. 이 책은 그의 생애와 사유를 통해, 오늘날에도 유효한 ‘지성의 실천’에 대해 조용하지만 강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진다.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주하기 - 침묵의 철학, 음악의 철학
장켈레비치의 철학은 논리적 정의나 개념의 나열로는 결코 다 담을 수 없다. 그의 사유는 언제나 언어의 경계 바깥으로 흘러간다. 그는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히 지나치는 어떤 ‘느낌’, 어떤 ‘기운’, 어떤 ‘여운’ 같은 것들이야말로 삶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이 세계는 늘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암시하지만 끝내 완전히 설명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는 철학을 음악에 비유한다. 음악처럼, 침묵과 소리, 말과 말 사이의 여백 속에서만 느껴지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음악은 장켈레비치 사유의 또 다른 언어였다. 드뷔시, 포레, 라벨 등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을 통해 그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과 존재의 미묘한 틈새를 탐색했다. “어떻게 하면 음악이라는 이 형언할 수 없는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철학을 만들 수 있을까?” 그는 “철학 없이, 음악 없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라고 되묻는다. 음악과 철학은 그에게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언어다.
“철학은 쓸모없음을 견디는 존엄의 언어”이다.
장켈레비치의 글은 때로 산문 같고, 때로는 서정시 같으며, 때로는 음악적이다. 죽음을 얘기하는데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철학이 무엇인지 묻는 그의 질문은, 실은 철학으로도 결코 온전히 닿을 수 없는 세계를 향한 끝없는 곡예와 같다. 그의 윤리는 거창한 도덕률이 아니라, 순간을 감지하고, 존재의 미묘한 감각을 포착하는 삶의 방식이다. 이 책은 바로 그 모호함과 여백, 설명되지 않는 세계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