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주의라는 죽음과 투쟁의 드라마
스펙터클의 서사는 왜 계속되는가?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되짚기 위해서는 그 전개과정에서 축적된 방대한 이미지들의 저장고 속으로 직접 들어가볼 필요가 있다. 제1장은 민주주의에 대한 사유를 제도나 관념적 차원에 가두지 않고, 역사적 장면을 생산하는 주체이자 그 관객이기도 한 ‘민의 몸’에 주목한다. 한국 민주주의를 떠올릴 때 반복적으로 소환되는 장면과 이미지를 ‘상상계’라는 개념으로 재고하며, 특히 1980년대에는 이러한 이미지들이 죽음과 희생의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분석한다. “자유라는 나무는 피를 마시며 자란다”(장준하)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국민의 피를 먹고 자란다”(김대중) 같은 언술이 널리 퍼졌고, 민의 죽음은 민주화의 필수불가결한 계기로 인식됐다. 민주화운동은 이러한 희생을 애도하고 계승하는 실천의 연속이기도 했다. 1987년 6월항쟁 당시의 광장은 민이 상연한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 거기 모인 군중의 기억 속에는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한열의 이미지가 선명히 각인되어 있었다. 이한열은 박종철의 죽음을, 박종철은 광주의 5·18 영상과 전태일의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의 연쇄반응과 그 결과에 대한 면밀한 분석은 ‘죽음의 참상과 결집의 장관’을, 정치적 ‘사이다와 고구마’ 사이를 오가며 스펙터클의 서사를 반복하는 한국 민주주의를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80년대생 사회학자가 들여다본
80년대 민주주의 속 깨지고 불탄 몸들
80년대 한국 민주주의를 그릴 때, 우리의 문화적 스크린에 가장 먼저 영사되는 장면은 국가폭력에 의해 연행되고 구타당하다 결국 죽음에 이르는 민의 몸이다. 제2장에서는 맞으면 쓰러지고 찌르면 피가 나는 등 철저히 물리법칙에 종속된 몸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를 ‘자연적 신체’라고 규정한다. 1980년 8월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의 진압 장면은 국가의 폭력적인 본질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사례였다.(74면) 제3장에 따르면 이러한 스펙터클과 조우한 민에게 구타당한 몸의 이미지는 훼손된 민주주의의 징후로 여겨졌으며, ‘광주’는 국가폭력의 상징이자 이를 반성하는 자원으로서 국가가 부당한 물리력을 행사할 때마다 회자되는 사건이 되었다.
제4장에서 분석하고 있는 민의 ‘집합적 신체’는 한국 민주주의라는 서사를 채우는 또다른 스펙터클이다. 인파로 가득한 광장, 촛불을 든 채 전진하는 군중의 물결, 사방에서 합류하며 밀려드는 사람들.(267면) 민은 주인공으로 무대에 등장하여 거대한 결집을 이룬다. 이는 그 자체로 대단한 스펙터클이며, 그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애도 의례 역시 또 하나의 장관을 이룬다. 함께 울고 노래하고 춤추는 애도의 공연은 그 자체로 집합적 민의 생명력을 활성화하는 신진대사일 뿐 아니라, 공연자이거나 관람자인 민 또한 새로운 민주주의 주체로 거듭나게 한다.(303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깨지고 불타는 희생자의 몸을 보고 자신의 몸을 움직여 결국에는 더 큰 몸, 더 뜨거운 민주주의를 만들어내는 과정이었다.
80년대 중반생인 저자는 이 과정에서 발생한 다양한 이미지들을 그 시대의 청년처럼 진지하게 들여다본다. 그리고 이 강렬한 승리의 서사가 오늘날까지 제공하는 정치적 도취로부터 우리를 흔들어 깨운다. 승리가 반복되는 동안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예외적인 축제로서 민주주의는 남았으나 지난하고 점진적인 일상의 민주주의는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우리 곁에서 살아가고 있는 취약한 이들의 삶을 돌아보고, 우리가 그들을 함께 돌볼 방법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눈앞에서 그들이 또다시 이른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말이다.
누구나 고른 빛을 발하는 광장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우리는 어떤 시민이 되어야 하는가?
이 책은 민주주의를 ‘죽음도 불사해가며 지켜야 할 어떤 이상’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살아 있는 몸들과 함께 가꾸어야 할 ‘일상의 실천’으로 다시 사유하게 한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는’ 서사에 매료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우리 민주주의의 서사와 의미를 다시금 숙고하는 제5장에서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죽음으로부터 부활을 이루어내는 성스럽고 거룩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민주주의, 민이 국가에 대해 승리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각자의 민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민주주의는 불가능한가?”(358~359면) 이러한 전환을 위해서는 더 크고 강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지금과는 다른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상상과 실천이 요청된다.
세월호 참사에서 태안화력발전소 노동자 김충현 씨의 끼임사고까지, 지금까지도 민의 죽음은 중단 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누가 또, 어떻게 죽었는가’를 묻는 사후적 질문을 넘어서 ‘누가 우리 곁에 위태롭게 살아 있는가’의 문제에 예방적인 주목을 기울여야 한다. 반복되는 비극이 아닌, 일상의 감각 위에 민주주의를 어떻게 쌓아올릴 수 있을 것인가. 살아 있는 이들의 목소리와 존재가 동등하게 빛을 발할 수 있는 광장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열어갈 것인가. 저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광장에서 만난 세계: 윤석열 퇴진 집회 시민 발언문 분석」이라는 제목의 공동연구로 이어갔다. 화제를 모은 이 연구는 광장에서 울려퍼진 시민들의 발화 속에 담긴 열망과 희망을 분석해, 오늘의 민주주의가 죽음과 투쟁의 스펙터클을 넘어 어떤 방식으로 다시 구성되고 있는지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살아 있는 이들의 삶을 지키기 위한 민주주의는, 바로 그 다양한 목소리와 고른 빛 속에서 시작되는 것 아닐까.(365면) 『몸, 스펙터클, 민주주의』는 한국 민주주의의 이미지들이 품고 있는 고통과 희열을 뚜렷하게 직면하면서도, 그 극적인 힘에 압도당하지 않은 채 새로운 민주주의를 희망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