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서울, 극장도시의 탄생》은 사회학자 박해남(계명대학교 사회학과 조교수)이 서울올림픽의 사회사적 배경과 준비 과정, 개최 이후의 사회 변화까지 정밀하게 탐색한 책이다. 지은이는 서울올림픽이 ‘국민의 습속개조’와 ‘도시의 경관개조’라는 사회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거대한 프로젝트였다고 진단한다. 군사정권은 시민을 ‘건전하고 근면한 배우’로 훈육하고, 도시를 ‘그럴싸한 무대장치’로 연출해 전 세계에 선보이려 했다.
실제로 서울올림픽은 성황리에 마무리됐고, 한국은 올림픽을 계기로 탈냉전과 세계화의 선두에 선 듯했다. 하지만 지은이는 그 결과 서울이 ‘외국인’의 시선을 내면화한 채 과시와 연출이 일상인 극장도시로 재구성됐고, 이로써 ‘공연계약’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질서, 즉 ‘88년 체제’가 본격화됐다고 진단한다. 88년 체제 속에서 시민들은 권리를 가진 주체가 아니라 늘 타인의 눈에 잘 보여야 하는 배우가 됐고, 도시 전체는 눈부신 스펙터클을 위한 무대장치가 됐다. 지은이는 이 책을 통해 88년 체제가 ‘87년 체제’, 즉 민주화 이후의 체제가 남긴 공백이자 지금 우리가 직면한 사회적 갈등의 근원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공연계약을 어떻게 사회계약으로 전환할 것인가.” 이 책을 관통하는 이 질문은 우리가 지금 어떤 시대적 전환점에 서 있는지 돌아보게 해준다. 2024년 겨울 이후 더욱 선명해진 갈등과 분열의 풍경은 ‘극장도시 서울’이 가진 근본적인 취약성을 드러낸다. 화려한 무대 뒤에 남은 공허를 마주하고, 차별과 배제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벗어날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책은 민주화 이후 답보 상태에 빠진 현재를 넘어서려는 이들에게 묵직한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1. 왜 서울올림픽에 주목해야 하는가?
― 공연론으로 다시 보는 우리 현대사의 핵심 장면들
― 군인들의 드라마투르기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서울올림픽
― ‘산업화 대 민주화’라는 구도에서 벗어난 새로운 사회학적 서사
식민과 해방, 분단과 전쟁을 거친 한국사회는 1961년 군인들이 집권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의 시대를 맞이했다. 개발의 시대는 ‘산업화’의 시대이자 군인들의 시선 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하는 독재의 시대였다. 고도성장 과정에서 억압받고 배제된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보다 인간다운 삶, 평화로운 체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1987년 6월을 거친 한국사회는 ‘민주화’의 시대를 맞이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현대사의 주된 흐름이다.
하지만 지은이는 ‘산업화 대 민주화’라는 구도로 바라볼 때 우리가 놓치는 것이 무엇인지 예민하게 감지한다. 일종의 승리 서사라 할 수 있는 이 구도 속에서 산업화 과정은 물론 민주화 과정에서도 배제된 이들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사회가 ‘사회’, 즉 ‘정상적인 삶이 가능한 시공간’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을 면밀하게 들여다봐야 할 필요가 분명하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공연론이라는 관점으로 한국사회의 형성 과정을 재해석한다. 지배집단의 통치전략을 일종의 드라마투르기(dramaturgy), 즉 공연을 기획하고 무대를 만들며 배우를 훈련시키고 무대를 연출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살피는 것이 공연론의 핵심이다.
여기서 지은이가 주목한 것이 바로 1988년 서울올림픽이다. 메가이벤트(Mega-event)라 불리는 올림픽은 국가의 대외 이미지를 개선하는 무대로 오랫동안 활용돼왔다. 군인들은 1961년 집권 후 질서를 확보하고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명목으로 감시와 통제를 일상화했다. 이들이 사회안정 못지않게 강조한 것은 ‘세계’ 또는 ‘외국인’의 시선이었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같은 대형 스포츠 이벤트는 외국인이 보기에 괜찮은 나라, 괜찮은 시민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던 군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무대였다. 박정희의 죽음으로 잠시 멈췄던 올림픽 준비는 1980년 신군부의 등장으로 다시금 물꼬를 텄다. 광주를 비롯해 민주화운동을 참혹하게 진압한 전두환과 신군부는 사회의 모든 역량을 올림픽에 쏟음으로써 전 국민의 습속을 개조하는 프로젝트를 재개했던 것이다.
“1981년부터 시각의 리바이어던에 매우 큰 변화가 찾아왔다. 군인-연출자들이 보기에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은 아시아인과 세계인 들로 하여금 한국인이 수행하는 공연의 관객이 되게 만들 메가이벤트였다. (…) 이제는 세계인 또는 ‘외국인’의 눈이 중요해졌기에 그들의 시선에 맞춰야 했다. 그래서 군인들은 밤 12시만 되면 통행이 불가능해지는 것과 같은 ‘비정상’을 세계인의 시선에 맞춰 ‘정상화’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라는 스펙터클의 관객이 될 세계인이 새로운 감시자가 될 것임을 한국사회 구성원에게 상기시킴으로써 감시와 규율의 체제를 유지해 나가고자 했다.” - 〈3장. 신군부, 메가폰을 손에 넣다〉, 126쪽
2. 올림픽은 서울을 어떻게 극장도시로 만들었는가?
― 시민들의 ‘사회계약’을 대체한 군인들의 ‘공연계약’
― 메가이벤트의 스펙터클한 공연 무대로 재창조된 서울
― 두 개의 ‘올림픽 공식 주거’, 아파트와 임대주택이 공존하는 도시경관의 계급질서
수도 서울은 가장 많은 인구가 유입된 도시였다. 전쟁으로 황폐해졌음에도 사람들이 서울에 끝없이 모여든 현상은 그만큼 자원과 생계부양책이 부족했던 사회의 실정을 보여줬다. 군인들의 눈에 서울은 혼돈 그 자체였다. 그들은 서울을 그럴듯한 무대로, 서울에 사는 사람들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공연에 부합하는 배우로 만들려고 했다. 빈민을 외곽으로 몰아내고 판자촌을 밀어내는 것부터 품행이 방정한 시민을 만들고 도시경관을 정비하는 것까지, 군인들의 시선은 도시 곳곳을 샅샅이 훑었다.
이 모든 감시와 통제는 ‘세계’에 보기 좋은 무대를 만들어냄으로써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공연계약’의 일환이었다는 것이 지은이의 논점이다. 토머스 홉스의 사회계약론은 시민들이 자신을 보호하려고 권력을 위임하면서 국가 또는 ‘리바이어던’이 형성됐다고 본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시민들의 사회계약이 아니라 군인들의 ‘공연계약’을 통해 만들어졌기에, 군인-연출자들의 드라마투르기가 사회 전반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군인들의 드라마투르기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시기가 바로 1988년 서울올림픽과 7년간의 준비 기간이었다. 1980년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는 서울올림픽을 개최하려고 사회의 역량과 자원을 총동원했다. 특히 올림픽의 무대가 될 잠실과 ‘외국인’의 시선이 모일 것으로 예상한 강남, 한강 등을 집중적으로 개발함으로써 서울 전체를 메가이벤트의 스펙터클한 공연 무대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서울올림픽은 군인들의 기대가 그대로 관철된 이벤트라기보다, 올림픽 때문에 쫓겨난 사람들, 민주주의와 평등, 통일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며 대안을 요구하는 공간이었다. 여러 갈등 속에서도 서울올림픽은 끝내 성황리에 막을 내렸고, 밀려난 사람들의 목소리는 올림픽 공식 주거의 복제본인 ‘임대주택’이라는 형태로 부분적으로나마 현실이 됐다. 권력의 시선과 내·외부의 목소리가 뒤섞이며 형성된 ‘극장도시 서울’은, 공연계약의 결과로 만들어진 두 개의 ‘올림픽 공식 주거’로서 중산층의 최신식 아파트와 빈민의 임대주택이 뒤섞이는 형태로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면서 형성된 도시경관의 계급질서가 극장도시에 그대로 투영된 셈이었다.
“연출자들의 관심은 민중을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아파트라는 현대적 주거 공간을, 올림픽의 무대장치를 제공하는 ‘자선의 스펙터클’을 연출하는 데 있었다. 그랬기에 이들은 신도시 어딘가에 임대아파트를 만들 때 앞으로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를 전혀 계산에 넣지 않았다. (…) 임대아파트 공급은 빈민으로 하여금 스펙터클한 무대장치로서의 올림픽 공식 주거를 좁은 평수로나마 체험하게 해주는 기회인 셈이었다. 4~5평의 공간에서 살던 이들에게 7~8평의 임대아파트는 이전보다 나은 주거 형태였다. 하지만 그들은 올림픽 공식 주거에 살기 시작한 중산층이 체험한, 한국의 국가적 지위 상승과 맞물린 개인의 사회적 지위 상승은 물론, 그에 따른 자부심을 전혀 체감하지 못했다. 임대아파트 거주자들은 중산층이 거주하는 신도시의 한복판에서 각종 차별과 낙인에 시달려야 했고, 올림픽 공식 주거의 스펙터클을 구석에서 지켜봐야 했을 뿐이었다.” - 〈10장. 서울올림픽이라는 마당놀이〉, 298쪽
3. 우리는 ‘88년 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가?
― 세계 또는 외국인의 시선을 내면화하면서 성립된 88년 체제
― 과시와 연출이 일상화된 극장도시적 삶에 대한 사회학적 비평
― 공연계약을 제대로 된 사회계약으로 바꿀 시대적 전환점의 모색
서울올림픽은 깨끗하게 정비된 극장도시 서울을 만들었고, 이후에도 서울은 도시적 삶의 모델이 됐다. 여기서 핵심은 공간뿐만 아니라 그 공간에 사는 사람의 생활방식 역시 한국사회의 모델이 됐다는 데 있다. 중산층은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나라의 시민이자 외국인이 보기에 그럴듯한 생활방식을 누리는 계층으로 자리 잡았고, 군인들의 드라마투르기를 변형해 자기 나름의 서사를 구축해왔다. 빈곤을 이겨내고 올림픽까지 성사시킨 나라의 모범시민이라는 자의식은 극장도시와 맞물려 형성된 대표적인 서사다.
메가이벤트를 통해 국민의 습속을 개조하고 도시의 경관을 정비하는 공연계약은 민주화 이후에도 지속됐다. 1993년 대전엑스포는 서울에 이어 대전 또한 극장도시로 만드는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의 청결과 시민의식을 강조하고 행사장 부지와 하천, 도로를 정비하는 등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행했던 일련의 작업이 엑스포를 준비할 때도 고스란히 반복됐다. 2002년 월드컵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준비됐다. 그런데 이때부터 크게 달라진 점이 있었다. 시민들이 열정적인 거리 응원을 마친 뒤 외부의 강제 없이도 도로를 깨끗이 치우고 소요나 분란 없이 스스로 질서를 유지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성숙한 시민의식이라 상찬할 수도 있겠지만, 지은이는 이와 같은 태도가 세계의 시선을 깊숙이 내면화한 데 따른 것임을 날카롭게 성찰한다.
지은이는 이처럼 공연계약으로 형성된 사회적 동의의 체계를 두고 ‘88년 체제’라 명명한다.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시민들을 억압했던 시선의 주체는 이제 군인에서 세계 또는 외국인으로 넘어갔다.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87년 체제는 한국사회를 지탱하는 정치구조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시선의 가상적 주체가 군인에서 외국인으로 바뀌었을 뿐 공연계약에 바탕을 둔 리바이어던이 온존하는 한 우리 사회의 내면화된 억압과 불평등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게 지은이의 통찰이다. 우리 사회에 갈등이 심해지고 위기가 반복되는 것은 세계에 그럴싸하게 보이는 데 골몰했던 공연계약의 체제, 88년 체제를 제대로 해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1988 서울, 극장도시의 탄생》은 공연계약을 제대로 된 사회계약으로 전환할 계기가 절실한 지금 이 시점에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2024년 겨울부터 한국사회가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갈등은, 사회계약이 아닌 공연계약에 기초한 88년 체제가 사회적 갈등과 분열 앞에서 얼마나 취약한지를 반증한다. 2020년대를 넘어가며 많은 사람이 87년 체제의 한계를 말하고 또 이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를 논하고 있다. 하지만 88년 체제의 한계야말로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마주해야 할 과제다. 공연계약을 어떻게 사회계약으로 전환할 것인가, 관객석에 앉아 무대 위의 배우를 평가하는 리바이어던을 어떻게 사회 구성원의 삶의 무대를 지탱하는 리바이어던으로 전환시킬 것인가 등의 질문을 진지하게 마주해야 할 시점이 바로 지금인 것이다.” - 〈결론.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서울올림픽과 88년 체제〉, 328~3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