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무라 고타로의 격동의 삶을 담은 시집
일본 근대 시를 완성한 시인이자 조각가이기도 했던 다카무라 고타로. 그의 삶은 전근대적 봉건 사회에서 근대 국가로, 그리고 제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식민지 획득과 침탈 전쟁, 패전으로 이어지는 일본 근대 사회의 여정, 그 자체였다.
조각가이자 도쿄미술학교 교수였던 아버지 고운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조각을 접했던 고타로는 1897년, 도쿄미술대학에 진학하는 한편, 문학에도 눈을 떠 1900년, 신시샤(新詩社)라는 문학 모임에 가입하고 와카(和歌) 투고를 시작한다. 미술대학 졸업 후 1906년, 미국을 시작으로, 영국, 파리 등지에서 유학하고 1909년 귀국하는데, 유학 생활 중 확립된 근대적 예술관으로 인해 여전히 전근대적이었던 당시 일본 사회와 예술계에 크게 실망한다. 마그마같이 끓어오르는 그의 에너지가 시로 표출된 것이 1914년 발표된 시 〈여정〉이다. 이 시가 잡지에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102행에 달하는 장시였다. 짧게 줄여 같은 해 출간된 그의 데뷔 시집 《여정》의 표제 시로 실렸다. 이 시는 예술가의 길을 가겠다는 고타로의 자기 선언과도 같다.
시집《여정》에는 시 일흔다섯 편과 “칠보 가루 유약”이라는 제목의 서정 소곡(小曲) 서른두 편이 발표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전반부에는 고타로가 전근대적 일본 사회와 대립하며 방탕하게 지냈던 시절이 담겨 있다. 그러다 〈칠보 가루 유약〉을 경계로 하여 작품 세계가 크게 변화한다. 〈칠보 가루 유약〉은 1911년부터 발표된 서정 소곡을 모은 것으로 서정 소곡은 메이지 말기부터 다이쇼 초기에 유행한 서정적 단시(短詩)다. 이 시를 발표하고 나서 고타로의 삶과 예술 세계는 새롭게 변화한다. 《여정》 후반부에는 지에코와의 만남 이후의 예술가로서의 고타로의 삶이 그려진다. 본서에는 이 시집에서 22편의 시를 옮겼고, 이 시집 출간 이후의 시를 〈여정 이후〉라는 제목으로 16편 실었다.
《여정》을 출간하던 해 12월, 고타로는 일생의 여인, 지에코와 혼인한다. 지에코는 고타로의 시 세계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912년 6월 첫 만남 이후, 9월부터 〈그대에게〉, 〈두려움〉과 같은 이른바 “지에코 시편”이라 불리는 시들을 발표한다. 이후 지에코를 소재로 한 시를 지속적으로 발표해 첫 시집 《여정》에, 그리고 이후 1941년 두 번째 시집 《지에코초》(1941)에 수록한다.
지에코와의 결혼 전후 정서적으로 안정적인 시를 발표하던 고타로는 이듬해인 1915년부터 시작(時作)을 줄이고 조각과 로댕 관련 번역에 전념한다. 그러다 1921년부터 다시 시작을 재개해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내적 열기”와 “열정의 덩어리”를 시로써 다시금 분출한다. 이 시기의 시를 모아 시집 《맹수 시편》 간행하려 했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 본서에 〈맹수 시편〉으로 묶어 35편을 실었다.
1931년 즈음, 사랑하는 지에코가 불행하게도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고타로는 지에코가 정신적으로 무너져 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영원한 이별의 순간을 맞게 된다. 지에코를 향한 애끓는 마음을 담은 시집 《지에코초》는 1941년 8월 간행되어 1944년까지 13쇄를 찍을 정도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일본의 국민 시로 불리며 사랑받고 있다. 그리고 전후 1950년 1월에 “지에코, 그 이후”라는 제목으로 여섯 편의 시가 발표되고 11월, 여기에 열여덟 편의 에세이를 더한 시문집 《지에코, 그 이후》가 간행되었다. 본 번역 시집에는 〈지에코 시편〉으로 모아 26편을 실었다.
본 책은 특히 고타로의 삶을 왜곡 없이 담기 위해 그가 아내를 잃은 후 전쟁 시기 발표한 전쟁 찬양 시집 《위대한 날에》에서 3편을, 전후 반성을 담은 자전적 시집 《전형》에서 18편의 시를 선정해 실었다. 전쟁에 협력했던 많은 작가들이 전쟁 이후, 자신들이 발표한 ‘전쟁 협력 시’를 ‘전쟁 시’로 왜곡하거나 이들 작품을 시집이나 전집에서 배제함으로 ‘시작의 공백기’로 만들고자 한 데 비해, 고타로는 자신의 전쟁 책임을 인정하고 교외에 오두막을 짓고 자급자족하며 반성의 시간을 보냈다. 1947년 7월, 자전적 연작시 스무 편을 “바보 소전”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는데, 어린 시절의 일왕 배례 경험, 할아버지의 단발, 아버지의 어전 조각,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해외 유학과 귀국 후의 데카당스한 삶, 예술가의 길, 지에코와의 사랑,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 전쟁 협력과 같은 자전적 내용이 담겼다. 이 시들은 1950년, 시집 《전형》에 수록됐다. 이 시집의 서문에서 그는 스스로를 “전형적인 바보상”이었다고 토로한다.
“이곳에 와서 나는 오로지 자신의 감정 정리에 몰두하였고 또 나 자신의 정체성 형성의 요인을 규명하기 위해 또 한번 삶의 정신사에서 치명적인 문제를 적발하고 추궁했다. 이 특별한 나라의 특별한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자신이 매몰되고 정신이 굴복되었는지를 보았다. 그리고 나의 우매하고 운명적인 발자취에서 전형적인 바보상을 발견하고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격동의 삶을 살았던 한 시인의 일대기를 엿볼 수 있는 시집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