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다채로운 방식
라임 앤 리즌 시리즈의 두 번째 이야기
믿을 수 없는 일들을 그저 지켜보는 것, 혹은 오랫동안 믿었던 일을 조금씩 의심하는 것. 최근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의 얼굴은 이 두 가지 문제로 복잡해 보인다. 단지 믿음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제 우리에겐 신비주의나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과학적 논박보다는 그것이 고통스럽고 지리멸렬한 현실을 얼마나 벗어나게 해주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오늘도 도파민의 충족을 위해 각종 귀신이나 악마, 외계인 등이 등장하는 영상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이 근대적 이성(reason)인지, 유튜브 알고리즘에 의해 무한히 갱신되는 순간적 공포나 자극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최근 ‘K-오컬트’라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영화나 문학 작품들(〈파묘〉, 〈퇴마록〉 등)은 이러한 자극의 대표적 예다.
오컬트는 그다지 신선한 장르가 아니지만, 유령처럼 오래된 장르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공권력으로 해결 가능한 범주의 살의나 범죄가 아닌, 초월적인 것에 대한 편리한 숭배와 소비문화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과연 오컬트의 부흥을 또 다른 문화적/인간적 몰락의 징후로 볼 수 있을까? 라임 앤 리즌의 두 번째 이야기와 함께 그 해답을 찾을 수 있길 바란다.
빈집의 문을 여는 일,
나를 알게 되는 모든 순간은 서늘하다
이번 호에서는 보광동 재개발 구역의 사물과 인물, 그리고 죽어 있는 것들 속의 살아 있는 것들을 다룬 사진가 임효진의 작품이 서두에 실렸다. 대부분의 거주자가 빠져나가 유령 동네처럼 보이는 곳에서 무성하게 자라는 식물들과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숨어드는 고양이들, 텅 빈 골목에서 순찰을 도는 경찰과 늘 어딘가로 달리는 배달 오토바이, 그리고 수많은 빈집들. 그렇게 깨어진 것과 부서진 것 사이에서 피어나는 것들은 우리가 텅 빈 장소에서 느끼는 ‘으스스함’의 근원이 바로 우리 자신의 가장 편안했던 공간(집)에서 움트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소설가이자 콜렉티브 ‘장소통역사’로 활동하는 최추영은, 오컬트 소설을 집필하기 위해 친구인 ‘윤’과 함께 교회를 방문하는 소설가 ‘나’의 이야기를 담았다. ‘분위기 있는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던 소설가 ‘나’는, 귀신 이야기 쓰기에 어려움을 느끼고 친구인 ‘윤’을 만나 꿈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교회로 향한다. ‘윤’은 귀신을 믿지 않고, 식습관을 통제하며 인간관계를 기능에 따라 분류하는 기계적 인물이지만, ‘나’는 경미한 과일 알레르기를 가지고도 과일 파르페를 “보고 싶어서” 주문하는 인물이다. 사실 이전에 ‘나’는 귀신을 직접 겪어보기 위해 소설 창작촌에 들어간 적이 있고, 소나무 알레르기로 힘들어했던 창작촌의 방 안에서 ‘나’를 “분위기처럼 여기는” 어떤 존재를 경험한다. 이처럼 ‘나’는 “나 스스로 충분하지 못했”다고 반복적으로 느끼면서, “내 몸 안에 동그랗고 딱딱한 갈색 아보카도 씨앗이 있길” 바란다.
어쩌면 우리가 오컬트를 통해 느끼고자 하는 것은, 오컬트(occult)가 문자 그대로 지시하는 것처럼 현실(이나 장소) 이면에 숨겨진 것, ‘나’라는 껍데기 안에 숨겨진 진짜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런 불편한(uncanny) 감각 속에서만 발현되는 날것들을 향유하는 일이 오컬트라는 장르를 지속시키는 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컬트라는 문화적 코드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그리고 무엇이 중한지 아는 일은 얼마나 중한가
그렇다면 그런 향유의 지평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알아보는 일도 중요해진다. 비평가 윤아랑은 픽션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오컬트의 역사와 그것의 의미를 분류, 체계화하고자 하는 글을 실었다. 그에 따르면 오컬트는 “사유 체계가 아니라 특정한 문화적 코드의 불균질한 집합”에 가까운 것이다. 그는 나아가 이런 질문도 함께 제시한다. “어쩌면 모호한 이합집산의 성질이야말로 이 ‘세속화 시대(찰스 테일러)’에 오컬트를 여전히 매력적이고 강력한 낱말로 만드는 게 아닐까?” 더불어 윤아랑은 오컬트라는 개념 속에 숨겨진 복합적인 성질을 묶어주는 것으로 픽션(fiction)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 “오컬트란 ‘인간적인 것’ 너머에 있는 광활한 세계와 그에 대한 인간의 소외를 동시에 인지하는 픽션의 한 유형”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듯 사진-소설-비평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연쇄반응을 통해, 독자들은 저마다 오컬트에 관해 한두 가지씩의 질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충실한 문화산업의 소비자로서 자신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진정한 자신을 아직 만나보지 못한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일 수도 있겠다. 다만 앞서 말했듯, 그 질문들은 자신에 관해 알고/모르고 있음을 알게 되는 일과 연결될 것이다. 중요한 건 그 질문이 무엇이든, 답은 홀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만들어낸 텅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은 언제나 자신의 몫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