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이와 영향력이 전혀 없는 아이의 대결!
교실 내 미묘한 힘의 논리에서 자유로워지는
‘어린 변호사’의 눈부신 자기 극복 서사
반에서 영향력이 가장 미미하고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않으며 혼자 조용히 책만 읽던 남자아이에게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학급 재판에서 변호사 역할을 맡아 보라는 제안을 한다. 처음에는 귀찮아서 싫다고 거절하는 남자아이에게 선생님은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걸?”이라고 말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듣고 있던 남자아이는 눈빛이 강하게 흔들리며 ‘이러면, 이러면 거절할 수 없지.’ 하고 생각하며 제안을 수락한다.
반 아이들은 학급 재판에서 검사 역할을 하는 반장과 새로 변호사 역할을 맡게 된 아이의 대결은 그 결과가 이미 정해졌다고 생각했다. 이 어린 변호사는 음침한 아이라고 불리우며 학급 내에서 존재감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판장이자 담임 선생님의 생각은 달랐다.
이 작품은 표층적으로는 따돌림 또는 괴롭힘 당하는 친구를 돕는 ‘우정’ 또는 ‘또래 관계’가 주제이겠으나, 심층적으로는 교실 내 미묘한 힘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또한 어린 변호사로 활약하는 주인공 남자아이가 교실 내에서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자리매김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자기 극복 서사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 남자아이는 내내 ‘어린 변호사’로만 지칭되는데, 이는 임시로 변호사 역할을 한 ‘누구’가 아니라 그 아이가 진짜 ‘변호사’라는 것을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독자에게 주인공을 자기와 동일시할 기회를 확실하게 제공한다. 아동문학은 어린이가 어른의 세계를 재연하는 ‘놀이’를 하고 있다는 함정에 쉽게 빠지기도 하는데, 이는 이러한 시각을 애초에 차단하고 독자가 이야기를 진지하게 수용하도록 이끈다. 이야기의 끝에 이른 독자는 어떤 작품보다 큰 만족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어린이 곁의 어른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모두 결과가 이미 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재판장이자 담임 선생님의 생각은 달랐다.”
담임 선생님은 이 작품에서 선한 듯 악한 듯 그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는 인물이다. 담임 선생님은 자신의 반에서 왕처럼 군림하며 자기만의 정원을 가꾸듯 반을 이끌려고 한다. 이에 선생님은 반에서 지나치게 큰 힘을 갖는 반장을 경계의 대상으로 삼고, 어린 변호사를 통해 반장의 힘을 분산시키려고 시도한다. 이와 같은 선생님 캐릭터는 서사에서 특유의 냉혹함과 차가움을 느끼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런 담임 선생님은 또 한편으로는 학생 중 또다른 하나인 어린 변호사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갖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 아이는 반에 친구가 없지. 담임 선생님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많은 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항상 감추는 버릇이 있었지만, 그들의 눈빛과 태도와 말을 받아들이다 보면 원하지 않아도 거의 모든 사실을 저절로 알게 되었다. 일부러 무심하게 군다면 또 모를까. (본문 29쪽 중에서)
전형적이지 않은 교사 캐릭터는 오늘날 어린이 곁의 어른이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면도 다분하다. 현실에서 어른들은 어쩔 수 없이 어린이에게 권위적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작가는 이러한 한계를 굳이 숨기지 않으면서도, 어린 변호사가 분명히 그 권위적인 어른의 도움을 받게끔 설정해 선생님이라는 캐릭터를 다각도로 바라보게 만든다. 전형적인 선한 인물이 아닌 양가성을 대표하는 캐릭터인 동시에, 주인공의 조력자가 되기도 하는 담임 선생님은, 그래서 어떤 캐릭터보다 입체적이며 이 작품 특유의 긴장감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해 낸다.
한편으로는 악한 인물이 자신이 악인임을 감추기 위해서 가면을 쓰듯, 선한 인물도 때로는 가면을 쓰고 있을 수 있음을 넌지시 암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현실에서 우리는 가면을 쓴 인물을 마주하면, 그 가면으로 인해 쉽게 속아 넘어간다. 영민한 사람만이 가면 뒤에 감춰진 본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데, 작가는 어쩌면 어린이들이 악인이든 선인이든 가면 뒤에 감춰진 본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영민함을 지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인물을 사용한 것일 수도 있다. 세상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지금 여기 우리 곁에 있는 어린이에게 필요한 어른의 역할은 복잡한 것을 복잡하다고, 어려운 것을 어렵다고 이야기해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법정 스릴러 장르의 극단성이 선사하는
끝없이 질문하고 끝없이 사유하는 색다른 재미!
허교범 작가는 동화에 장르적 스킬을 가져와 인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장르적 문법과 이론을 잘 따르고 있다. 아동문학에서 흔치 않은 법정 스릴러 이야기를 읽으며, 어린이 독자는 적극적으로 사고를 재구성하며 읽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질문이 시작되면 답을 찾을 때까지 끝없이 매달리게 되는 이 장르의 극단성이 어린이에게도 색다른 재미로 다가갈 것이다.
추리 자체의 재미도 재미이지만, 교실을 우리 사회의 축도로 사용한 것으로 본다면 다양한 은유를 찾는 지적 재미 또한 느낄 수 있다. 마지막에 모든 것이 밝혀지는 작품일수록 은유를 사용하거나 작품 곳곳에 촘촘하게 실마리를 숨겨두기 마련이다. 급하게 줄거리를 따라가기보다 찬찬히 읽어 나가다 보면 다 읽고 나서야 숨겨진 의미를 알게 되는 최고의 읽기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긴 이야기를 끝까지 다 읽고 나면 작가가 숨겨 놓은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깜찍한 엔딩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