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와 모닥불, 조각배, 손거울, 가시 없는 장미…
작은 존재의 눈으로 세상을 돌아보는 정호승의 짧은 이야기들
정호승 시인의 우화소설은 동식물이나 사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우리가 평소 눈여겨보지 못한 것들의 시선으로 인간 세상을 새롭게 비추어 본다. 잘못 만들어져 버려졌다가 새로운 쓰임을 찾게 되는 항아리의 이야기, 서울역 앞의 노숙자들에게 따뜻함을 주기 위해 고민하는 눈(雪)들의 이야기, 실제의 하늘을 훨훨 날고 싶은 그림 속 새의 이야기 등 《항아리》는 평소 좀처럼 눈길을 받지 못하는 존재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정호승은 상처 입고 찢어지고 갈라지고 모난 것들을 보듬어 끌어안는다. 정호승의 글에는 고요한 온기가 배어 있다’라는 안도현 시인의 추천사처럼, 《항아리》는 초판 출간 후 20여 년이 지나 새로운 독자를 만나면서도 이 세상에 필요한 따스함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다.
새로운 감각의 일러스트로 빛나는 새로운 장정
글과 그림이 어우러지며 피어나는 서정적인 세계
2025년 비채에서 펴내는 《항아리》는 정호승 시인의 섬세하고 서정적인 세계를 오늘의 감각으로 새롭게 담아냈다. 동시대적 언어 감각으로 작품을 전면 다듬었으며, 주요 장면을 더욱 깊이 있게 경험할 수 있게끔 박선엽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을 더해 새롭게 단장되었다. 책 곳곳에 삽입된 전면 풀컬러 삽화는 이야기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환기하며 정호승의 우화 세계를 오늘날 감각으로 불러낸다. 세련된 표지와 고급 양장 제본은 《항아리》를 처음 만나는 독자는 물론 오래전 이 이야기를 품었던 독자에게도 간직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항아리》가 품은 본질적 메시지는 시대가 바뀌어도 변함없이 따뜻하고 단단하다. 쓸모를 다했다고 생각이 들 때, 아무도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듯하고 자신이 세상에서 비켜난 존재처럼 느껴지는 순간. 《항아리》에 담긴 이야기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감정과 존엄을 되짚어보게 한다. 버려졌지만 다시 쓰임을 얻은 항아리,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끝내 하늘을 나는 새, 눈사람으로 가득한 서울역과 그곳에서 피어나는 작은 온기까지. 작고 사소한 존재들이 세상에 말을 걸고 의미를 되찾아가는 여정의 끝에는 마치 은은한 종소리처럼 깊은 울림이 남는다. 《항아리》는 새로운 세대에게는 스스로의 의미를 다시 찾을 용기를, 이미 이 이야기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독자에게는 그때의 다정함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위로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