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주사 물고기 풍경이 사랑을 찾아 만나는 넓은 세상
정호승 시인이 쓴 만남과 헤어짐에 관한 눈부신 이야기
정호승 시인의 우화소설은 동식물이나 사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우리가 평소 눈여겨보지 못한 것들의 시선으로 인간 세상을 새롭게 비추어 본다. 《연인》은 운주사 처마에 매달린 물고기 모양 풍경 ‘푸른툭눈’이 사랑에 관해 고민하며 시작한다. 푸른툭눈은 자신과 나란히 매달린 다른 풍경 ‘검은툭눈’의 마음이 변했다고 생각해, 처마에 매달린 쇠줄을 끊고 날아올라 세상을 떠돌기 시작한다. 지리산을 넘어 섬진강으로, 바다를 건너 서울까지 날아간 푸른툭눈. 붕어빵을 먹는 사람들과 횟집에 갇힌 물고기들, 서울역의 노숙자, 비둘기까지. 푸른툭눈은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보며 ‘사랑이란 무엇인가, 내가 사랑할 존재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에 나름의 답을 찾아간다.
정호승 시인은 어느 날 운주사에 찾아갔을 때 물고기 풍경이 하나가 보이지 않고 빈 쇠줄만 흔들리고 있었다고, 그 물고기가 무엇 때문에 어디로 날아갔을까 궁금해서 《연인》을 쓰게 되었다고 밝힌다. 작고 사소한 것에도 눈길을 주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은 만물이 인격을 지닌 이야기를 꽃피운다. 그리고 시인이 피워낸 환상의 이야기는 현실에 사는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연인》은 이 모자람 없는 것 같은 궁핍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울려 퍼지는 사랑의 풍경 소리이다’라는 김용택 시인의 말처럼, 초판 출간 후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연인》은 사랑과 존재에 대한 질문을 변함없는 울림으로 전한다.
새로운 감각의 일러스트로 빛나는 새로운 장정
글과 그림이 어우러지며 피어나는 서정적인 세계
2025년 비채에서 펴내는 《연인》은 정호승 시인의 섬세하고 서정적인 세계를 오늘의 감각으로 새롭게 담아냈다. 동시대적 언어 감각으로 작품을 전면 다듬었으며, 주요 장면을 더욱 깊이 있게 경험할 수 있게끔 박선엽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을 더해 새롭게 단장되었다. 푸른툭눈이 바라본 운주사의 솔숲과 처마 끝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순간, 섬진강을 따라 흐르는 물결과 바다를 향해 날아가는 고요하고도 격정적인 비상의 장면, 비정한 서울을 내려다보며 서울역에서 지새우는 밤까지. 책 곳곳에 삽입된 전면 풀컬러 삽화는 이야기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환기하며 푸른툭눈의 여정을 오늘날 감각으로 불러낸다. 세련된 표지와 고급 양장 제본은 《연인》을 처음 만나는 독자는 물론 오래전 이 이야기를 품었던 독자에게도 간직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연인》이 품은 본질적 메시지는 시대가 바뀌어도 변함없이 강렬하다. 타인의 마음이 멀어졌다고 느끼는 순간, 자신이 머무는 자리를 벗어나고 싶을 때, 세계와 단절되어 있다고 느끼는 밤. 푸른툭눈의 여정은 우리가 사는 보편적 삶의 은유와 같다. 푸른툭눈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독자는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고독과 해방의 순간들을 고루 경험하게 되고, 이야기가 끝나면 마치 물고기가 지나가며 남긴 물결처럼 가슴속에 작은 떨림을 간직하게 된다. 정호승 시인의 문장은 이처럼 잊히지 않는 감정의 결을 따라가면서 우리가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기억을 조용히 어루만진다. 《연인》은 새로운 세대에게는 자기만의 날개로 사랑을 찾아 나설 용기를, 이미 이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겨본 독자에게는 그때의 마음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감동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