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인의 시선으로 새롭게 조명한 조선의 문화와 사람들
전설의 섬에서 실제의 나라로, 낯선 시선을 통해 발견한 익숙한 조선의 또 다른 얼굴
역사 저술가 박영규 작가가 서양인의 기록을 통해 바라본 조선의 진면목을 담은 신간 《파란 눈의 조선》을 출간했다. 이 책은 17세기 하멜부터 19세기 러시아와 미국, 프랑스인에 이르기까지, 조선을 방문한 다양한 ‘파란 눈’의 서양인들이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조선의 풍경과 문화, 그리고 조선인을 입체적으로 복원한 역사 교양서이다.
황금의 섬 ‘코레아’를 찾아 나선 유럽인들
16세기, 유럽의 열강들은 황금을 찾아 세계 곳곳으로 항해를 떠났다. 그들의 지도 위에는 황금이 넘쳐나는 전설의 섬 ‘코레아’가 있었다. 포르투갈인이 만든 세계지도에는 한반도가 ‘코레아제도’, 또는 ‘코레아섬’으로 표기되었고, 심지어 ‘가축도 금목걸이를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이 전설의 배경에는 아랍인들이 신라를 ‘황금향(黃金鄕)’이라 기록한 사실이 있었고, 그 오랜 기록이 유럽인들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다.
가장 적극적으로 ‘코레아’를 찾으려 한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일본과의 교역을 통해 이미 동아시아에 진출한 네덜란드는 조선과의 무역을 시도했지만, 일본 정부의 반대로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던 중, 예기치 않은 인물이 등장했다. 조선에 표류해 13년간 억류되었다가 유럽으로 돌아온 핸드릭 하멜이다. 그가 집필한 《1653년 바타비아발 일본행 스페르베르호의 불행한 항해일지》, 즉 《하멜표류기》는 유럽 사회에 조선의 존재를 처음 구체적으로 소개한 기록으로, 유럽은 다시 ‘코레아’ 열풍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들이 상상한 코레아는 실재하지 않았다. 17세기 말 이후 유럽인에게 코레아는 점점 신화에서 현실로 다가왔고, 19세기에 이르러 조선이라는 나라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조선, 전설의 땅에서 가난한 나라로
19세기, 청나라를 통해 동아시아에 진출한 서양인들이 조선을 방문하면서 조선은 더는 지도 위의 ‘섬’이 아니었다. 이들은 조선이 반도에 위치한 작은 나라임을 확인했고, 부유한 황금의 땅이 아니라 유교를 국시로 삼고 외래 문화를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폐쇄적인 사회임을 알게 되었다. 특히 조선의 기독교 박해는 서양인들의 눈에 충격적으로 비쳤다. 선교를 위해 조선에 들어간 프랑스 신부들까지 무자비하게 처형한 현실은 조선을 미개하거나 야만적으로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단순한 ‘문을 닫은 나라’로만 머물지 않았다. 조선을 직접 체험한 서양인들은 오히려 그 내부에서 놀라운 문화적 우수성과 인간적 품격을 발견했다. 박영규 작가는 “그들은 조선인보다 먼저 조선 문화의 우수성을 발견하고, 조선인보다 더 세밀하게 조선을 기록했다”며, 이 책의 집필 배경을 설명한다.
온돌과 한글, 외국인이 먼저 본 조선의 자산
가장 많은 찬사를 받은 조선의 문화는 단연 ‘온돌’이다. 하멜은 조선의 겨울을 ‘화덕 같은 방’이라 표현했고,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방바닥에 불을 지피는 독특한 구조에 감탄했다. 비록 어떤 이들은 “관 속에 들어간 기분”이라고 풍자했지만, 추운 겨울날 몸을 녹이는 데 온돌만 한 것이 없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었다. 오늘날에도 온돌은 한국 주거문화의 대표적인 자산으로 평가받는다.
한글에 대한 인식 역시 매우 놀라웠다. 하멜은 한글을 “배우기 쉽고 모든 것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문자”라고 극찬했고, 프랑스 신부들은 목숨을 걸고 전도하면서도 한글의 문법 체계를 정리하고 사전을 편찬했다. 이들은 10만 개 이상의 단어를 수록한 한불사전을 만들었으며, 심지어 조선어와 라틴어 간의 사전도 집필했다. 작가는 “한국인이 정리하지 못했던 한글 문법을 오히려 외국인들이 세밀하게 기록한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고 말한다.
책이 있는 집, 교육을 중시한 민족
또 하나의 문화적 자산은 ‘교육’이었다. 병인양요에 참전했던 프랑스 화가 쥐베르는 조선의 초가집에서 책을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는 “극동의 나라에서는 글을 못 읽는 자는 멸시받는다. 프랑스에 이런 기준을 적용하면 멸시받을 사람이 너무 많을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조선의 문해율이 프랑스보다 높았던 현실에 그는 경외심까지 느꼈다.
하멜 또한 “양반들은 자식 교육에 열성적이며,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매우 점잖고 부드러운 태도로 가르친다”고 기록했다. 이런 문화는 오늘날 한국의 높은 교육열과도 연결된다. 조선은 단순히 배타적인 나라가 아니라 교육과 지식의 가치를 알고 실천하는 사회였던 셈이다.
가마꾼과 마부, 외국인이 다시 쓴 조선의 인물사
《파란 눈의 조선》이 특별한 이유는, 서양인의 시선을 통해 우리가 미처 주목하지 않았던 조선의 사람들을 다시 조명했다는 점이다. 특히 가마꾼과 마부는 조선 기록 속에서는 단순한 하인으로 묘사되지만, 외국인들에게는 이야기꾼이자 여행의 동반자, 때로는 가이드이자 경호원으로 등장한다. 그들은 산길을 지나며 도적을 막아주고, 흥겨운 노래로 손님을 달래주는 조선의 숨은 얼굴이었다.
작가는 “사극에도, 역사서에도 제대로 조명된 적 없는 이들이 외국인의 기록을 통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있었다”며, “그 기록을 읽으며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있었는지를 절감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익숙함을 낯설게, 낯섦을 깊이 바라보는 책
《파란 눈의 조선》은 단순한 외국인 견문록의 정리가 아니다. 이 책은 우리가 너무 익숙해서 보지 못했던 조선을 외국인의 낯선 시선을 통해 되돌아보게 하는 하나의 ‘거울’이다. 그 거울 속 조선은 약소국이기도 했고 폐쇄적인 나라였지만, 동시에 교육을 중시하고, 문화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희생하며 외국인에게 따뜻한 온돌방을 내어주었던 사람들의 나라였다.
이 책은 역사와 문화, 인물과 풍속이 어우러진 복합적인 다큐멘터리이자 잊힌 조선의 얼굴을 복원하는 한 편의 회고록이다. 오늘의 한국인이 스스로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또한 ‘조선’이라는 과거를 새롭게 바라보기 위해 꼭 읽어야 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