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어떻게(How) 읽는가
해 질 무렵 갑자기 일상적이고 도구적인 것들이 낯설다. 우리가 이름 붙인 것들이 자신의 그림자를 만들며 다가온다. 해, 의자, 빗자루라고 써 놓고 익숙한 언어를 파쇄한다. 마틴 하이데거(1889~1976)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존재가 언어를 통해서 드러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언어가 존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기에 침묵 자체를 문학으로 강조할 수도 있다. 하이데거는 이 시대를 존재를 망각한 궁핍의 시대로 보지만, 가난한 시인은 기꺼운 홀로움의 고독 속에서 존재와 마주하는 따뜻한 정인들이다.
얼마 전 한강이 노벨문학상 시상식에서 밝힌 소감문이 우리 시대를 대변한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자본주의 체제 불안과 폭력이 인간의 주된 정서라면 간혹 평안과 행복은 선물처럼 주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평안과 행복의 공급처는 죽은 자나 과거가 아니라 지금, 여기 내 의식 또는 인식 방법에 있다.
이름이라는 그릇에 갇히기 전
무봉의 알이었던 나
딸도아니고아내도아니고엄마도아니고며느리도아닌
에덴의 이브, 그 원죄에서 벗어나면 나는 누구일까
모든 언어의 입말 털어내고
아무런 존재의 옷도 걸치지 않는 그 순간
사람이니까 외롭다는 말, 그립다는 말
그것만이 내가 이 세상에 갖고 온 나의 본질일까
육체에 갇혀
평생 그리워한 사람
마지막 기차를 타고 올 손님, 결국 나였다
-「나는 내가 그립다」 전문
이브 공식에 갇혀 내가 되지 못한 내가 부엉이 존재자를 알게 된 것은 어쩌면 여성의 금기를 깬 반 전통적 접근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모상에 시간을 두었다면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물, 불, 흙, 공기 등 4원소가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려는 자연적인 운동 안에서 ‘지금’이라는 찰나의 순간을 시간의 본성으로 둔다. 즉 플라톤은 하늘,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과 자연의 시간, 여기에 둔다.
그렇다면 서양 철학 전체를 플라톤의 아류로 본 니체는 어떠한가. 니체는 그 어떤 형상을 모두 부정하고 이미 만물 자체로 완전을 주장한다. 지금 여기 나 자신의 사랑하는 것을 진리로 본다.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하면 영원 회귀, 욕망의 카르마는 영원히 반복된다는 의미다.
이 시집은 지금 여기 자연계 안에서 현존재(Dasein, 있음을 읽는 자)인 인간이 전존재를 용재자로 들어 올리는 하이데거식 작업이고 그 안에서 물아일체의 나로 회귀하는 정신의 승화 과정이다.
산다는 일은 내가 나를 이해하고 나를 기억하려고 애쓰는 진아 찾기의 과정이다. 작은 단어 하나 짧은 문장 하나에서 경이와 진리를 찾으며 날것 상태의 흰 몸을 만들어 가는 것, 인식하는 주체로 살아가면서 사물이 직접 드러난 현상 혹은 존재를 읽고 이해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