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자동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되기와 배치의 관점에서 다시 쓰는 진보의 조건들
반복은 과거의 되풀이가 아니다
차이와 더불어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진보의 길을 묻다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은 철학자 이정우가 2008년 이후 되살아난 시대의 기시감과 퇴행의 정동 앞에서 던진 근본적 질문에서 출발한다. 민주화 이후 당연한 듯 여겨졌던 진보의 궤적은 어느 순간부터 개발독재의 유령과 파시즘의 시뮬라크르로 대체되었고, 우리는 다시금 익숙한 장면들을 목격하게 되었다. 저자는 이를 단순한 후퇴가 아닌 ‘반복’의 문제로 사유하며, 마르크스적 사유를 들뢰즈적 철학으로 확장해 ‘차이를 동반한 반복’이라는 존재론 위에서 진보의 가능성을 되짚는다. 진보는 직선적인 시간 위에서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의 장 속에서 도래하는 차이의 방향성 안에서만 출현할 수 있다.
이 책의 1부는 이러한 진보의 존재론적 토대를 사유하기 위한 서론이자 중심축으로, ‘시간의 종합’이라는 개념을 핵심 고리로 제시한다. 시간은 그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사건들을 주체가 어떻게 종합하고 계열화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구조를 이룬다. 진보 또한 과거를 동일하게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주체화의 가능성과 함께 구성되는 생성의 흐름이다. 이 책은 반복과 차이, 사건과 주체, 그리고 기억의 정치학을 통해 진보를 이념이 아니라 구조이자 실천으로 다시 사유한다. 진보는 여전히 가능하지만, 그것은 오직 반복을 감지하고 다르게 배치할 수 있는 주체들 속에서만 가능하다.
되기 없이는 진보도 없다
되기의 윤리와 사건의 배치가 만들어 내는 실재의 귀환
책의 2부 「타자-되기의 에티카」에서 이정우는 ‘되기’(becoming)라는 개념을 통해 진보의 존재론을 구성한다. 여성-되기, 노동자-되기, 소수자-되기. 이것은 정체성의 정치가 아니라 동일성의 체계를 탈주하는 생성의 운동이다. 소수자란 태생적 조건이 아니라 자신을 생성의 흐름 안에 내던지는 주체다. 진보는 이 되기의 윤리와 사건들의 계열화를 통해서만 도래할 수 있다. 되기는 실재의 귀환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실재는 언제나 기존의 의미 배치를 뚫고 귀환하며, 그것을 감지하고 계열화하는 자리에 새로운 주체가 형성된다. 이 책은 진보를 이데올로기의 반대편에서 귀환하는 실재의 ‘진리-사건’으로 정의하며, 기존의 재생산 구조를 전복하는 윤리적-정치적 실천으로서 되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주체는 다수자의 구조 안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타자-되기를 통해 스스로를 재형성하는 존재다. 진보란 바로 이 되기의 반복, 생성의 반복 속에서만 가능하다.
진보의 존재론을 다시 쓰다
다양체의 철학, 그리고 사유의 마지막 전환
책의 마지막 보론 「다양체란 무엇인가」는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에 존재론적 깊이를 더하는 장이다. 저자는 들뢰즈 철학의 정수인 ‘다양체’(multiplicité) 개념을 중심으로, 진보를 다시 존재론의 차원에서 사유한다. 다양체는 단순한 복수성이 아니라 내재적인 차이들과 흐름들이 이질적인 구성 속에서 하나의 장을 형성하는 존재론적 구조다. 이 책은 베르그송, 리만, 들뢰즈, 그리고 바디우를 경유하면서 다양체 개념의 물리적·수학적·철학적 의미를 정리하고, 그것이 되기, 사건, 배치의 개념과 어떻게 접속되는지를 보여 준다.
독자는 이를 통해 진보는 단일한 이념이나 계급적 통일성이 아니라 서로 다른 흐름들이 상호 접속하면서 구성하는 다양체적 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안에서 되기와 차이, 반복과 배치는 서로 얽혀 생성의 지도를 이룬다. 진보는 하나가 아닌 여럿의 정치, 동일성이 아닌 차이의 윤리, 정태성이 아닌 생성의 존재론 위에서만 성립한다. 철학자 이정우의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은 이러한 다양체의 철학을 통해 진보를 단지 회복하거나 계승해야 할 과거의 이념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새롭게 구성되어야 할 과제로 다시 사유하게 만든다. 반복과 차이, 되기와 배치의 역동 속에서 진보는 여전히 가능하며, 바로 그 가능성의 조건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