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이면 눈썹 끝에 희미하게
남은 흔적이 그려진다
따라오는 뒷바라지도
노을 따라 저물어간다
반백 년을 꾸려온 집안 살림
그 뒷모습이 물빛처럼 젖어 들고
꿈으로 지낸 무지개 같은 삶
거울 속으로 붉은 눈망울이 보인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감도는 상처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가버리고
부서지고 흩어져 버린 발자국들
깨어진 거울 조각인 양
한 줌 가루로 떠났다
한없이 보고 싶고 아프지만
하늘의 별이 된 그대
빛나는 저 별과 눈 맞추어도
무슨 신호인지 알 수가 없다
-「해질녘이면 눈썹 끝에」 전문
해질녘은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깃드는 시간이다. 사람들이 쓸쓸함을 가장 깊게 느끼는 시간임은 물론이다. 집을 떠난 새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고, 일을 마친 사람들이 귀가하는 시각이다. 그 시각이 되면 서산 너머로 하루를 뜨겁게 달구었던 태양이 힘을 잃고 서서히 숨어가는 시간이고, 어둠은 서서히 지상을 덮으며 내게로 가까이 다가오는 시간이다. 해외 나간 사람이면 고국에 대한 그리움, 타지에 나가 있다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 외출해 있다면 집에 대한 그리움, 이 시각이면 부모가 그립고, 형제들이 그립고, 곁을 떠난 사람들이 그리워하기 딱 알맞은 어스름녘이다. 수도승이나 수녀들의 파계가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시간도 해질 무렵이라고 하지 않던가. 해질녘은 가슴에 남은 상처가 되살아나는 시각이다. 술꾼들은 그런 분위기가 감정에 겨워 술집을 찾거나 포장마차에 들러 지친 마음이나 상심한 가슴을 데워 가기도 하고 외로운 사람들은 길거리를 방황하기 알맞은 시각이다.
이 시에서 해질녘이면 눈썹 끝에 희미하게 곁을 떠난 이의 모습이 걸린다. 그동안 곁에서 해준 뒷바라지도 노을 따라 저물어 간다. 기억들은 희미해져 가고 모습은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반백 년을 꾸려온 집안 살림하며, 묵묵히 보여준 뒷모습에 물빛처럼 젖어 들어간다. 꿈같이 지낸 삶이 무지개를 탄다. 그러나 거울 속으로는 힘들었던 눈망울이 충혈된 채 보인다. 어둠이 깊어갈수록 내게는 상처로 남고 당신은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가버렸다. 뒤에 남은 당신 발자국도 깨어진 거울처럼 부서지고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당신은 한 줌 가루로 떠나 버렸으니, 당신이 한없이 그립고 보고 싶지만 당신은 하늘에 별이 되어 반짝거리며 내게 신호를 보내온다. 하지만 나는 별과 눈 맞추어도 그 신호가 무슨 뜻인지 알아차릴 수가 없다.
사별한 아내를 그리워하는 끔찍한 고백이 담겨져 있는 작품이다. 조용범 시인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 중의 하나가 진정성이라는 것이다. 어떤 대상이든 꾸밈이나 허구성보다는 직접 체험이나 자신의 진실한 느낌으로 다가선다. 그러기에 독자들의 생각과 크게 다름이 없다. 시인이 내세울 수 있는 진정성이야말로 시가 지닌 힘이다. 화려한 무늬보다는 안에 숨겨진 내적 힘에 의해 전달력을 가질 때 시는 힘을 얻게 된다. 그것은 진실이 주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