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디에 있는가
고봉준(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1.
강영은의 시는 내향성 언어로 쌓아 올린 존재 물음의 건축물이다. 여기에서 내향성 언어란 세계를 재현하는 풍경화의 언어가 아니라 사물과 세계에 자신의 내면을 덧칠한 추상화의 언어에 가깝다는 뜻이고, 건축물이란 시집이 단일한 세계가 아니라 그 내부에 몇 개의 독립적인 공간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시집이라는 형식은 건축물과 유사하다. 어떤 공간을, 어떤 경로를 따라 탐사하느냐에 따라 그 건축물에 대한 인상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시집 『그리운 중력』에는 최소 3개 이상의 독립적인 공간들이 존재한다. 어떤 공간은 여기와 저기, 현재와 과거의 차이를 중심으로 직조되어 있고, 어떤 공간은 삶과 죽음, 그 속에서 ‘나’의 기원과 근거를 반추하는 실존적 물음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또 어떤 공간은 글쓰기, 즉 시(詩)에 관한 자의식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그리운 중력』이라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중적 방식의 읽기가 필요하다. 먼저 독립적 공간들이 펼쳐 보이는 미학적 풍경을 중심으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복수의 공간들이 어우러짐으로써 서서히 드러나는 세계의 풍경에 주목해야 한다. 이 풍경의 핵심은 ‘나’에 관한 존재 물음이다. 시인은 과거와 현재, 저곳과 이곳 사이의 불화를 매개로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에 관해 질문한다. 이런 점에서 강영은의 시에서 시 쓰기와 삶은 평행적 관계를 형성한다. 표제작 「그리운 중력」에서 시 쓰기와 삶의 문제는 정확히 중첩되므로 형식적 층위에서는 이 시를 건축물의 ‘입구’라고 명명해도 좋을 듯하다. 하지만 「그리운 중력」은 내용적 층위에서 ‘출구’에 가깝다. 두 가지 읽기 방식이 교차하고 시 쓰기와 삶의 문제가 이 시에서 중첩되기 때문이다.
2.
어제 떠나간 네가 있고 너와 거닐던 강가가 있고
새 한 마리 앉았던 가는 벼랑 너머 나부끼는 바람
건빵 봉지에 든 별사탕처럼 빛나지 않는 두 눈은
조금도 사리도 없는 밤바다
이 모든 비유는 먼 옛날 켜두었던 등잔
넌 누구니,
어두워질 때까지 놀아도 괜찮은 거니,
인적 드문 우리들의 내면은 질문의 문을 열지 못하네.
혼자 남은 질문이 슬픔을 어루만지네.
벽장 속에 갇힌 새처럼
새장 속에 남은 새처럼
슬픔은 빠져나오기 힘든 눈동자
만져지지 않는 밤하늘
입김 불어가며 그렷다 지우는
이 차가움
캄캄한 적막, 지울 수 없는 각막
눈 코 입 잡아당기는 착각
메아리 없는 곳, 두 손 두 발 되돌려주지 않는 곳으로
미끄러질까 봐
금 갈 것 같은 나를, 깨질 것 같은 나를
감싸는
이 노래는 오늘도 반복되는 노래
유리창의 노래.
- 「유리창의 내면」 전문
첫 번째 공간은 ‘나’에 관한 존재 물음의 세계이다. 이 시에는 ‘free style rap 형식으로’라는 부제(副題)가 붙어 있다. 이것은 이 시가 의미의 계열이 아니라 랩(Rap)처럼 ‘소리’의 계열을 따라, 그리고 유기적인 전체성이 아니라 연상작용의 파편성에 기대어 창작되었음을 알려주는 시적 기호이다. 가령 이 시에 등장하는 “벽장 속에 갇힌 사람처럼/새장 속에 남은 새처럼”이나 “캄캄한 적막, 지울 수 없는 각막/눈 코 입 잡아당기는 착각” 같은 진술은 이러한 랩(rap)의 흔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에서 ‘벽장’과 ‘새장’의 관계, ‘적막’과 ‘각막’과 ‘착각’의 의미론적 관계를 따지는 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고 이 ‘rap 형식’으로 쓰인 이 시를 단순한 유희의 결과물로 간주해선 안 된다. 여기에는 강영은 시의 근본적 지향이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를 읽기 위해서는 먼저 시적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우선, 시적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몇몇 시어들을 찾아보자. 일차적으로 제목에 등장하는 ‘유리창’과 본문에 등장하는 ‘밤바다’, ‘등잔’, ‘슬픔’, ‘밤하늘’, ‘입김’ 등이 눈에 띈다. 오독의 위험을 무릅쓰고 시적 상황을 재구성해 보면 화자는 지금 실내 공간에서 유리창을 통해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밤바다’와 ‘밤하늘’이라는 시어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시간은 밤이며, 유리창에 “입김 불어가며 그렸다 지우는/이 차가움”이라는 진술로 미루어 짐작건대 계절적 배경은 겨울인 듯하다. 요컨대 이 시는 화자가 어느 겨울 저녁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화자가 응시하고 있는 창밖 풍경은 아무래도 현재형이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어제 떠나간 네가 있고 너와 거닐던 강가가 있고/새 한 마리 앉았던 가는 벼랑 너머 나부끼는 바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화자는 이러한 풍경을 배경으로 삼아 “넌 누구니,/어두워질 때까지 놀아도 괜찮은 거니,”라고 묻는다. 이것은 현재의 ‘나’가 유년의 풍경 속에 존재하는 과거의 ‘나’를 향해 묻고 있는 장면이다. 그러니까 화자에게 ‘유리창’은 그 너머, 즉 바깥 풍경이 펼쳐지는 캔버스가 아니라 자신이 ‘내면’에 존재하는 과거-시간이 펼쳐지는 스크린인 셈이다. 화자는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이 질문을 던지면서 ‘혼자’ 남은 ‘슬픔’을 경험하며, “입김 불어가며 그렸다 지우는” 행동의 반복이 암시하듯이 과거의 시간을 그리워한다. 따라서 “금 갈 것 같은 나를, 깨질 것 같은 나”의 주체는 사물-유리창이 아니라 화자의 내면-유리창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화자는 이 균열의 위험을 직감하고 있으면서도 “유리창의 노래”를 반복한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이 시는 시인의 말처럼 ‘랩(rap) 형식’을 빌렸다고 할지라도 지극히 슬프고 쓸쓸한 곡조(曲調)의 노래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특히 유리창을 통해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행위가 궁극적으로 자신의 내면에 떠오른 몇몇 풍경을 들여다보는 행위로 귀결되는 장면은 강영은의 시가 근본적으로 내향성임을 암시하고 있다.
나를 가장 많이 울리고
나를 가장 많이 웃게 하는 이가
나의, 애인입니다.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누구보다 나를 모르는 이가
나의, 애인입니다.
나의 표정과 감정을 살피거나
나의 외모와 마음을 지배하는 이가
나의, 애인입니다.
함께 쓰러지고
함께 일어서는 이가
나의, 애인입니다.
어제 했던 약속도
어제라는 독약도 모두 삼키는 이가
나의, 애인입니다.
매일 만나거나 죽어서도 만날 이가
나의, 애인입니다.
너무 많은 애인을 가져서
무겁습니다.
너무 많은 애인을 두어서
괴롭습니다.
아니 외롭습니다.
내가
나의, 애인이기 때문입니다.
- 「나의 애인」 전문
내향성의 시작(詩作)에서는 글쓰기의 출발점과 도착점 모두에 ‘나’가 위치한다. 물론 이때 복수의 ‘나’들, 가령 출발점의 ‘나’와 도착점의 ‘나’, 질문의 대상이 되는 ‘나’와 질문하는 ‘나’는 다른 존재이다. 강영은에게 시 쓰기는 이처럼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과 성찰이라는 문제와 연결된다. 다만, 이러한 물음과 성찰이 환기하는 존재 물음은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시적인 의미에서 ‘나’에 관한 존재 물음은 지금-이곳이, 나아가 그곳에 있는 ‘나’라는 존재가 단일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하이데거가 설명했듯이 존재 물음이란 결국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은 지금-이곳에서의 존재 방식에 관해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거나 최소한 현존 자체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이곳에서의 삶이 만족스러운 사람은 결코 ‘나’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존재 물음이라는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 그 자체, 즉 ‘나’가 자신을 메타적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 ‘나’와 ‘나’의 관계는 “내가/나의, 애인이기 때문입니다.”라는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애인’ 관계이다. 일반적으로 ‘애인’은 가장 친밀한 사람, 즉 ‘나’의 리비도가 집중되는 대상을 가리킨다. 이러한 특수한 관계로서의 ‘애인’이라는 의미는 이 시에서도 동일하다. 문제는 “너무 많은 애인을 가져서/무겁습니다./너무 많은 애인을 두어서/괴롭습니다.”라는 진술처럼 ‘애인’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화자는 너무 많은 ‘애인’이 괴로움과 외로움의 원인이 된다고 진술하고 있다. 왜 너무 많은 ‘애인’이 괴로움과 외로움의 원인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나’와 애인으로서의 ‘나’가 “나를 가장 많이 울리고/나를 가장 많이 웃게 하는 일”나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누구보다 나를 모르는 이”라는 진술처럼 친밀하면서도 때로는 가장 먼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너무 많은 애인을 두어서/괴롭습니다.”라는 진술과 “두개골은 너무 많은 나를 가졌다.”(「나의 두개골」)라는 진술은 일맥상통한다.
3.
시집 『그리운 중력』의 두 번째 방은 시(詩)에 관한 자의식의 세계이다. 강영은에게 시는 시인이라는 존재, 혹은 감정과 자의식을 지닌 신체를 통과한 세계의 이미지에 언어라는 형식을 부여하는 행위이다. 이처럼 시는 궁극적으로 ‘언어’와의 관계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 시인이 자신을 가리켜 “말을 돌보는 건 나의 사명”(「말테우리」)이라고 소개할 때, 그것은 ‘시’와 ‘언어’에 관한 자의식을 강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말테우리」는 말[馬]과 말[言]이라는 동음이의어를 활용하여 ‘말’이라는 기호에 중의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기호의 중의성은 ‘말[馬]’과 ‘말[言]’이라는 기호의 간격이 좁을 때, 다시 말해 두 가지 모두의 의미로 해석될 때 절정에 이른다. 가령 “별도 달도 뜨지 않는 밤, 말 중의 말, 고독이 마중 나온다. 말과 나는 유일한 어둠이 된다. 말과 나 사이 경계가 없어진다.”라고 이야기할 때가 그렇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영원히 말을 모는 말 속에 영혼을 모는 나는 말테우리.”라고 말할 때, 그것이 말[馬]에 관한 진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말 중의 말”이나 “말과 나 사이의 경계가 없어진다.”라는 진술도 마찬가지이다. 시는 시인의 마음과 신체를 통과함으로써 특정한 방식으로 굴절된 이미지에 언어라는 형식을 부여하는 행위이지만, 이때 ‘언어’는 시인의 소유물, 즉 시인 자신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시를 가리켜 언어예술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시인이 ‘언어’를 자유자재로 운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적인 무언가가 시인의 신체를 관통하여 ‘언어’로 표현된다는 의미이다. 이 경우 ‘언어’는 시인의 신체 또는 손끝에서 현현하지만, 그렇다고 시인의 소유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다녀갔다.
책상 앞에 앉아 깜빡 조는 사이
잠깐, 다녀갔다.
다시 올까?
그가 좋아하는 펜을 들고 기다려 보지만
온다는 기약 없다.
언제 오려나,
할미꽃 필 때까지 시간을 던져보지만
할미꽃 진 무덤처럼 감감무소식이다.
머리가 하얗게 센 시인에게
로맨스가 찾아올 리는 만무?
오늘은 수태하기 가장 좋은 날
떠나간 영감(靈感) 대신 살아있는 영감(令監)과
나들이 간다.
죽은 영감(靈感) 대신 탯줄 잡아주던 영감(令監)과 함께
꽃 핀다고, 꽃 진다고,
뻐꾹새 우는 산천 지나 기도로 늙은
내 어머니 사는 마음속 보금자리,
유다 마을로 간다.
뱃속에 든 아기를 기다리는
마리아처럼,
- 「방문(visitation)」 전문
철학자 플라톤이 자신의 예술관을 피력한 『이온(ION)』에는 시의 원천에 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모든 훌륭한 서사시인들은 전문적 기술로 해서가 아니라 신들린 상태에서 그리고 영감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이 모든 아름다운 시들을 읊으며, 훌륭한 서정시인들도 마찬가지니까요.” 플라톤은 시를 영감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신령(Spirit)에서 영감의 원천을 찾았다. 시가 영감의 산물이라는 플라톤의 주장은 시가 전문적인 기술의 결과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시가 영감의 산물이라고 말할 때,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시가 시인의 ‘바깥’에서 도래한다는 사실이다. 시가 ‘바깥’에서 도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일차적으로 시인-신체의 바깥에 존재하는 대상이나 세계가 시인의 신체를 통과함으로써 시가 탄생한다는 의미이며, 궁극적으로는 시의 출발점이 시인-신체의 내부가 아니라 바깥, 즉 의지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시의 타자성의 문제를 “그가 다녀갔다.”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다. 강영은에게 시는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책상 앞에 앉아 깜빡 조는 사이/잠깐, 다녀갔다.”나 “그가 좋아하는 펜을 들고 기다려 보지만/온다는 기약 없다.”라는 진술처럼 예고 없이 온다. ‘방문(visitation)’이라는 제목은 바로 이러한 시의 타자성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와 ‘바깥’의 관계는 ‘나’에 관한 존재 물음의 장면에서도 동일하게 목격된다. 가령 「비의 수상식(授賞式)」이 그렇다. 이 시의 화자는 “침대 위에 누워 죽은 듯이 누워/비에 닿는다.”라는 진술에서 암시되듯이 ‘침대’에 누워 있다. 침대가 위치한 곳이 침실인지 병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생각 속에도 비는 내려/빗방울 하나하나 꽂힐 때마다/파문 지는 바다”라는 표현처럼 여기서의 ‘비’는 현존하는 대상이 아니라 ‘생각 속’에 존재하는 풍경의 일부이다. 화자는 침대에 누워 비가 내리는 바다를,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파문 지는 바다”를 생각한다. 시인은 이 상황을 “비의 시체처럼 흠뻑 젖은 생각에/나를 도둑 맞는다./돌아보면 나는 없었지.”라고 진술하고 있다. 여기에서 비는 “일기 예보 없이 도착하는/비의 거품들”이라는 설명처럼 시간의 흐름을 뚫고 들어와 화자를 과거의 특정한 순간으로 데려가고, 화자는 ‘비’의 등장으로 인해 현재-시간에 균열이 발생하는 이러한 실존적 경험을 “나를 도둑 맞는다”라고 표현한다. “나를 도둑 맞는다”라는 것은 “흠뻑 젖은 생각”에 자신을 모두 빼앗긴다는 것, 따라서 일시적으로나마 현실의 질서가 무력화된다는 의미이다. 시인은 예고 없이 도래하는 이 비가 “정류장에 서 있던 나는 누구였을까”라는 존재 물음으로 이어지는 장면을 표현하고 있지만, 이 장면에서 흥미로운 것은 “예보 없이 도착”하는 ‘비’와 “책상 앞에 앉아 깜빡 조는 사이/잠깐, 다녀”(「방문(visitation)」)가는 ‘영감’의 공통성이다. 존재 물음과 마찬가지로 ‘시’는 현실을 지배하는 시간의 연속성을 일시적으로 중단(out of joint)시킨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는 순간, 또는 ‘비’와 ‘영감’처럼 바깥에 속하는 어떤 것이 일상적 질서 안으로 침입하는 순간, 우리의 견고한 일상은 잠시 중단된다. 요컨대 시와 그것의 타자성은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 세계가 그다지 견고하지 않다는 것을, 그것은 오래된 시간이 도래하는 순간 전혀 다른 풍경으로 바뀐다는 것을 말해준다. 시적인 순간은 일상의 시간 속에 “흐르지 않는 시간”(「눈물은 공평하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경험이며, 시는 바로 이 경험에 ‘언어’라는 형식으로 부여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중략-
평생 걷다가 한 번쯤 만나는 그대가 극지(極地)라면 함박눈 쌓이는 하룻밤쯤은 극지로 가는 열차를 꿈꾸어도 좋겠네.
기차보다 먼저 도착하는 기적 소리에 실려 한 번도 닿지 않은 그대 마음속, 극지로 떠나보는 것도 좋겠네.
함박눈 맞으며 걷고 있는 나는 여기 있지만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는지, 얼어붙은 빙하가 녹고 있는지
묵묵히 선 빙벽 아래 길을 내고 고요 속에 싹 트는 한 송이 꽃을 기다릴 수 있으리.
지구상에 홀로 남은 동물처럼 가다가, 서다가, 돌아서서 울다가 얼어붙은 대지와 한통속이 된들 어떠리.
발자국만 남긴 그림자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 미증유의 존재면 어떠리.
그리움은 여기보다 조금 더 추운 곳에서 얼어붙고 기다림은 여기보다 조금 더 따뜻한 곳에 닿고 싶어 하는데
마지막 남은 눈사람처럼 눈 감고 귀 닫고 오로지 침묵 속에서 그대에게 닿을 순간을 기다리네.
나 여기 포근한 함박눈 속에 누워 있으니, 그대 함박눈 속을 다녀가시라. 모든 길은 몸속에 있으니, 목적지가 어디든 다녀가시라.
목숨이 오고 가는 길도 하나여서 녹아내리는 손바닥 위의 눈송이
나, 함박눈 같은 극지에 도착하네. 함박눈 쌓이는 하룻밤이 수목한계선에 꽃으로 피네.
- 「그리운 중력」 전문
표제작인 이 시는 ‘중력’이라는 자연법칙을 원용하여 그리움의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알다시피 극지(極地)는 지구에서 ‘중력’이 가장 강한 곳이다. 1연에서 ‘극지’는 ‘그대’와 동일시되고, 2연에서 ‘극지’는 “그대 마음속”으로 제시된다. 따라서 극지를 향해 떠난다는 것은 ‘그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대’를 향해 나아가는 ‘나’의 여정이 결코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고요 속에 싹 트는 한 송이 꽃”을 기다리는 일처럼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지구상에 홀로 남은 동물처럼 가다가, 서다가, 돌아서서 울다가 얼어붙은 대지와 한통속이 된들 어떠리.”라는 진술처럼 고독하고 슬픔을 피할 수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울다가 얼어붙은 대지와 한통속”이 된다는 것, 또한 “발자국만 남긴 그림자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 미증유의 존재”가 된다는 것은 ‘그대’에 대한 그리움이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간절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침묵 속에서 그대에게 닿을 순간”을 마냥 기다린다.
그런데 ‘그대’를 향한 이 그리움의 마음은 9연에서 불현듯 방향이 바뀐다. “나 여기 포근한 함박눈 속에 누워 있으니, 그대 함박눈 속을 다녀가시라. 모든 길은 몸속에 있으니, 목적지가 어디든 다녀가시라.”라는 것이 그것이다. ‘함박눈’은 “함박눈 맞으며 걷고 있는 나”라는 진술처럼 ‘그대’에게 가는 과정의 일부였으나 9연에서는 ‘나’가 위치한 현실-장소로 제시된다. 이와 동시에 화자는 “그대 함박눈 속을 다녀가시라.”처럼 ‘그대’를 호출하고 있다. 즉 시의 전반부에서는 ‘나’가 ‘그대’를 향해 나아가는 마음이 표현되었으나, 후반부에서는 ‘그대’가 ‘나’를 향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전면화하고 있다. 그리고 이때 ‘길’은 “모든 길은 몸속에 있으니”처럼 ‘몸’으로 제시된다. 즉 ‘그대’가 ‘나’에게 오는 길이 몸 바깥의 길이 아니라 ‘몸속’의 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나’가 ‘그대’에게 이르는 길은 물론이고 ‘그대’가 ‘나’에게 이르는 길도 결국 ‘몸’이라는 의미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그대’에 향한 화자의 그리움이 통상적인 의미의 감정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대’의 정체는 무엇일까? 전체적인 맥락에 비추어 보면 그것은 시인이 간절히 소망하는 존재의 상태이거나 시(詩)일 가능성이 높다. 「방문」은 시인에게 시(詩)가 ‘오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시인은 이러한 진술 다음에 “목숨이 오고 가는 길도 하나여서 녹아내리는 손바닥 위의 눈송이”라는 진술을 첨가하고 있다. “목숨이 오고 가는 길도 하나여서”라는 것은 ‘목숨’ 이외의 다른 것, 즉 시(詩)가 오고 가는 길이 하나임을 설명한 것이다. 시인이 이러한 시-언어의 탄생과 소멸이라는 사건을 “목숨이 오고 가는 길”이라는 삶과 죽음이라는 실존적 사건과 겹쳐놓는다. 이는 시인에게 시(詩)가 어떤 의미인가를 보여주는 진술이다. 그것은 “함박눈 같은 극지에 도착”하는 사건과 “하룻밤이 수목한계선에 꽃으로 피”는 사건이 나란하게 놓일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