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소의 시들을 지배하는 철학소philosopheme는 ‘결별’이다. 그는 지루한 시간과 결별하고, 반복되는 현상들과 헤어지며, 규정된 얼굴들과 작별한다. 그는 떠나고 버리거나 해체함으로써 잠재성의 거대한 세계를 연다. 지루한 현재와 반복되는 현상들은 존재의 심연을 보지 못하게 하거나 왜곡한다. 존재의 실체를 보기 위해선 하나의 얼굴이 아니라 무수한 얼굴 혹은 프랜시스 베이컨F. Bacon의 그림에 나오는 것처럼 뭉개진 얼굴이 필요하다. 그 어떤 얼굴도 존재를 가리지 못하도록 얼굴을 해체할 때, 얼굴을 특화한 제도와 규범이 탈영토화된다. 이광소에겐 정지된 현재 혹은 멈춰 선 현상이야말로 혐의이다. 그는 영토화된 규범을 흔들고 새 얼굴을 만들며 그것이 재영토화되는 순간 다시 다른 얼굴을 만든다. 이 시집의 도처에서 그가 ‘얼굴’에 대한 사유를 수행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얼굴을 지워야 할까요
부위별로 나를 재단하는 사람들
중식도로 잘리고 입맛대로 팔리고 씹히는 공유물로서
나는 제물이 아니다
제물이 아니라고, 아니라고 해도
프라이팬에서 구워지는 고깃덩어리처럼
지글지글 타고 오그라진 살을 꾸적꾸적 씹는다
마음은 탱크가 지나간 황폐한 상태
잠시 사라졌던 얼굴은 다시 태어난다
얼굴을 향해 끈덕지게 쫓아오는 녀석들
…(중략)…
1파운드의 살을 저울질하는 베니스 상인을 피해
오늘부터 나는 얼굴을 지운다
이 세계는 우리가 공존하는 세계가 맞아?
추락의 위험을 무릅쓰고 절벽을 오른다
나는 얼굴이 없는 자다
- 「얼굴을 지운다」 부분
시인에게 얼굴은 존재를 영토화하려는 시선들의 표적이다. 그런 시선들은 얼굴로 존재를 규정한다. ‘나’의 얼굴에 따라 ‘나’는 “부위별로” “재단”된다. 내가 할 일은, “아니라고, 아니라고” 말하며 얼굴을 계속 지우는 것이다. 문제는 하나의 얼굴을 뭉개는 순간 다른 얼굴들이 계속 태어난다는 것이고, 그 얼굴들을 따라 ‘규정성’의 시선들이 “끈덕지게 쫓아”온다는 사실이다. 시적 화자는 계속해서 얼굴을 지움으로써, 즉 스스로 “얼굴이 없는 자”가 됨으로써 주체화에 대항하고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들뢰즈의 말대로 “얼굴은 오로지 파괴되고 해체될 때만, 위대한 미래를 갖는다”(『천 개의 고원』). 들뢰즈는 소위 ‘얼굴의 정치학’을 이야기하면서 얼굴이 기호의 의미화significance와 주체화subjectification라는 두 가지의 권력을 반영하고 각인한다고 말한다. 의미화와 주체화는 기호가 사용되는 사회의 위계와 가치의 서열에 따라 기호 위에서 이루어진다. 들뢰즈가 볼 때, 얼굴은 이와 같은 “의미화의 흰 벽”과 “주체화의 검은 구멍”이 교차하는 자리에 존재하는 “매우 특수한 기제”이다. 얼굴을 해체한다는 것은 이 흰 벽과 검은 구멍 위에서 원래의 얼굴로 돌아가지 않고 새로운 얼굴을 계속 생산함으로써 의미화와 주체화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것을 말한다.
독거미야
나는 지금 얼마나 격렬하냐
독거미에게 물리고서야 보이는 세계
얼굴이 뭉개지고
얼마나 격렬해야 새로운 세계가 열릴까
- 「타란텔라 춤」 부분
이 시의 도입부에 따르면, 타란텔라 춤은 이탈리아 남부의 타란텔라라는 도시에 전해 내려오는 민속춤의 일종으로, 독거미에 물렸을 때 독거미를 흉내 내며 재앙을 풀고 치유하기 위해 추는 춤이다. 문제의 해결을 문제 자체에서 찾는 이런 태도는 얼굴의 해체 과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얼굴의 기호화와 주체화에 저항하는 일은 바로 문제의 진원인 얼굴 자체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얼굴의 정치학은 기존의 얼굴과 작별하면서 새로운 얼굴을 만들고 그 얼굴이 재영토화되기 전에 다시 또 다른 얼굴을 발명함으로써 얼굴을 영원한 유동성의 상태에 놓는 것을 지향한다. 위 시에서 “얼굴이 뭉개”져야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얼굴이 자리를 잡는 순간, 세계는 고정되고 결정되며 범주화된다. 주체화의 검은 구멍과 의미화의 흰 벽에 빠지지 않으려면, 바로 그런 작용들이 가동되는 얼굴-기호에서 얼굴을 지우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해독은 오로지 독 위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생명체만 사는 곳
즐겁게 노래하던 시절은 사라졌나요
모두 오염되지 않은 싱싱한 세계였는데
…(중략)…
언젠가는 빙하역에 도착하리라는 신념으로
보일 듯 사라지지 않는 신기루처럼
새로운 얼굴을 피워올리는 사람들이 있는 한
빙하역도
북극곰도
그들을 오래도록 기억할 거예요
- 「빙하역에서」 부분
표제작인 이 작품의 “빙하역”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얼굴이라는 기호가 특권화되기 이전의 탈의미적이고 탈주체적인 순수의 세계이다. 물론 기호 지배의 공간에서 그런 세계는 마치 사라진 상상계처럼 오직 가상으로만 존재한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생명체만 사는 곳”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즐겁게 노래하던 시절”은 의미화와 주체화, 그것들이 초래하는 가치들의 서열화를 통해서 사라진 지 오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주장한다. “새로운 얼굴을 피워올리는 사람들이 있는 한” 빙하역은 오래 기억될 것이라고. 새로운 얼굴을 피워올리는 것은 기존의 얼굴들을 지우고 뭉갬으로써만 가능하다. 약간의 과잉 해석이 허용된다면, 이광소에게 있어서 시 쓰기란 바로 이렇게 기호가 만든 다양한 얼굴들을 지우고 또 지우며 다시 “피워올리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