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을 묻다
그렇다면 이들은 미국을 어떻게 바꾸려 하는가. 즉 ‘마가’(MAGA)의 핵심은 과연 무엇인가.
1.
첫째는 정치전쟁(계급전쟁)이다. 이들은 오늘날 미국이 ‘실패 국가’가 된 것은 워싱턴을 장악한 공화당과 민주당이 공모한 결과라고 여긴다. 네오콘의 보수든, 리버럴의 진보든, 세계를 종횡무진하는 이들 글로벌 엘리트가 본토의 토박이 민중을 착취해왔다는 것이다. 기업의 경영자들은 공장을 중국과 아시아로 이전해 천문학적인 이익을 거두고, 국가의 경영자들은 세계 곳곳에서 끝없는 전쟁에 세금을 퍼붓는다. 그럼에도 그 대가는 오롯이 내륙에 살고 있는 평범한 백인들이 감내하고 있다. 파워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이 빌어먹을 세상, 그러니 이제 기득권 엘리트의 낡아빠진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진짜 풀뿌리를 위한 인민민주주의를 이루어야 한다.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그것이 바로 새로운 미국이다.
2.
둘째는 문화전쟁이다. 이들은 기존의 세계화, 자유주의, 다문화주의를 반대하고, 그 대항 항으로 민족주의, 반자유주의, 백인-기독교 근본주의의 기치를 내건다.
‘민족주의’의 요체는 국경을 강화하고, 자국 산업을 보호하며, 미국 우선의 외교를 펼치는 것이다. 자유주의 패권국가 노릇을 하느라 골병이 들어가는 이 나라를 되살려 위대한 미국을 재건하자는 것이다. 즉 ‘세계 시민의 자유’가 아니라 ‘미국 인민의 안전’이 우선이다.
‘반자유주의’는 PC(정치적 올바름)를 집중적으로 타격한다. 환경보호, 젠더 감수성, 인종 간 평등, 성 소수자 및 이민자의 권리 등 자유와 인권을 중시하는 진보 좌파의 ‘정체성 정치’가 미국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특히 이제까지 문화적 다수파로서 특권을 향유하던 신앙심 두터운 백인들(특히 고령층)은 커다란 위협을 느꼈다. 전통적 가치관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며 부정당한 것이다. 어느새 이곳이 자신의 모국이 아닌 것만 같은 낯선 감정마저 싹터 올랐다. 이게 나라냐? 이것이 미국이냐? 토착적인 것의 대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가정에서는 가장과 부모의 권리를 옹호하고, 학교에서는 교사의 역할을 강조하는 전통적 가치를 옹립했다. 그래야 무너진 가족을 복원하고, 무질서한 교실을 복구할 수 있다. 자유주의 기치 아래 승승장구하던 엘리트와 마이너리티로부터 미국을 구해내어, 비정상을 정상화해야 한다.
‘백인-기독교 근본주의’는 다문화주의를 겨냥한다. 냉전 이후 다문화주의는 세계화를 지탱하는 주류 세력의 문화전략이었다. 그 시대정신의 상징이 바로 오바마였다. 그러나 오바마가 역설했던 만인들의 “약속의 땅”에 트럼프는 우리가 남이가, “America First”로 맞불을 놓았다. 이질적인 것의 융합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의 수호를 앞세웠다. 어디까지나 미국의 근간은 백인이며, 미국의 근본은 기독교다. 다시 미국적인 것, 미국다움을 회복해야 한다. 국경에는 만리장성을 높이 세우고, 불법 이민자들은 몽땅 추방하여 미국을 미국답게,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자는 것이다.
즉 어느덧 미국 정치의 핵심은 ‘미국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정체성 다툼이 되었다. 2019년 바이든의 대선 출마 선언부터가 그러했다. 트럼프가 연임하여 백악관에서 8년을 지내게 된다면 ‘우리가 누구인지’를 영원히 바꿔버릴 것이라고, 민주주의의 수호자이자 자유주의의 이상향이라는 미국의 핵심 가치와 보편적인 이념들이 경각에 달려 있다고 염려했다. 그래서 2020년 트럼프를 누르고 백악관에 입성한 바이든이 ‘America is Back’을 강조하며 안도했던 것이고, 4년 후 해리스를 이긴 트럼프가 재차 ‘America is Back’을 내세우며 응전했던 것이다.
‘무엇이 진짜 미국인가?’ 양 진영이 말하는 미국이 이토록 멀어진 적은 없었다. 미국의 기원, 18세기의 건국사 논쟁까지 거슬러 올라가 양보와 타협 없는 정치적 내전이 일상화된 것이다. 이제 워싱턴의 정치는 정당 간 조율과 협상이라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틀을 벗어나게 되었다. 전심전력으로 피아(彼我)를 식별하고, 적군과 아군이, 선과 악이 다투는 ‘영혼을 둘러싼 투쟁’이 된 것이다.
3.
셋째는 세계 1위 국가를 지켜내기 위한 패권전쟁이다. 즉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레짐 체인지, 패러다임 시프트를 이루어내려는 일종의 소프트 쿠데타다. 이들은 지금이야말로 국가 비상사태라고 여긴다. 전속력으로 테크노-차이나를 완성해가고 있는 중국과 부상하고 있는 젊은 아시아를 지켜보며 냉전 이후 처음으로 패권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공포감과 절박함마저 느껴진다.
중국은 이미 10년 전부터 인공지능, 로봇, 전기차, 신재생에너지, 양자컴퓨터, 우주기술 등 미래산업에 전력 질주해오고 있다(2025년에 독일과 일본을 능가하고 2035년에는 미국도 앞질러서 재차 세계 1위 국가가 되겠다는 장기계획이다). 태양광은 이미 세계를 제패했다. 드론도 DJI 등 중국산이 압도한다. 전기차 기업 BYD는 테슬라를 앞질렀다. 테슬라의 옵티머스 로봇보다 중국의 유니트리 로봇이 더 화려하게 움직인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의 IT/가전 박람회 ‘CES 2025’도 중국 기업이 3분의 1을 차지했다. 그리고 화룡점정, 트럼프의 취임 시기에 맞춤하여 딥시크(DeepSeek, 深度求索)가 출격했다. 골리앗 미국의 빅테크에 중국의 스타트업 딥시크가 강력한 어퍼컷을 날린 것이다. AI 경쟁에서도 중국이 미국에 못지않음을 만천하에 과시한 것이다.
2025년 CES의 화두가 ‘물리(Physical) AI’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지난 2년간 대규모 언어모델에 기초한 생성형 AI 경쟁은 미국이 앞서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오감으로 세상을 경험하는 ‘물리 AI’는 또 다른 차원이다. 시각, 청각, 촉각 등 전 감각이 동원되어 세계를 실감하고 인지한다. 이 피지컬 AI의 매개체가 될 자율차와 로봇과 드론 등에서 중국이 초가속으로 질주하고 있다. 이 인공물들에 딥시크의 인공지능이 장착되면 딥쇼크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빅테크의 봉건적 독점체제를 붕괴시키는 오픈소스 AI의 혁명이 중국의 기술 생태계를 통해 구현되는 것이다. 특이점을 향한 AGI(일반인공지능) 경쟁에서도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는, 아편전쟁 이후 세계사의 가장 중차대한 분수령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죽기살기로 미국을 개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디지털 총력전 체제를 갖추고 대약진 운동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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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오늘날 아메리카 전역을 뒤덮고 있는 ‘MAGA’의 물결은 단지 트럼프 현상에 그치지 않는다. 여기에는 시대전환과 문명전환을 이루고자 하는 다양한 세력과 사상의 거대한 흐름이 뒤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 격랑의 한가운데에서 미국의 다음 40~50년을 디자인하고 있는 네 사람을 우리가 깊이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그래야 비로소 뉴-아메리카의 행로, 나아가 세계의 향방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치적․사회적 격동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미국을 산업문명의 표본으로 삼아 산업화-민주화-세계화를 이루고 선진국 “K”의 반열에 오른 우리로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AI혁명이 촉발하는 디지털 신문명의 제대로 된 청사진이 필요하다. 새로운 세계감이 절실하고, 새로운 세계관이 절박하며, 새로운 세계상이 절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