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내 안의 시간을 깨운다
공연장을 자주 찾는 저자는 피아노의 숨결과 발레 군무의 호흡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움직이는 예술의 아름다움을 만난다.
내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처음 방문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발레 공연과 에르미타주 미술관 때문이었다. 화려한 궁전 건축과 유서 깊은 예술이 넘치는 도시. 특히 영하 20도를 웃도는 혹독한 겨울을 뚫고 극장으로 향했던 건,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통 러시아 발레의 정수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백조의 호수’는 작곡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첫 발레 음악이다. 마법에 걸려 백조로 변한 공주 ‘오데트’, 그 저주를 풀려는 왕자 ‘지그프리트’, 그리고 검은 백조 ‘오딜’과 악당 ‘로트바르트’가 얽힌 동화적인 서사가 특징이다.
1877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처음 선보인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1895년 마리우스 프티파와 레프 이바노프가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에서 재안무한 버전이 대성공을 거두며 고전 발레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레오니드 야콥손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를 관람했을 때, 2막에 등장하는 32마리 백조의 군무에 압도당했다. 어깨부터 팔, 손끝까지 날갯짓을 흉내 내는 포르 드 브라(Port de bras)의 디테일이 모두 한결같아, 마치 진짜 백조들이 호수 위를 유영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작은 호흡과 떨림 마저 동일하게 맞출 때, ‘인간의 몸이 이렇게까지 정교해질 수 있나?’ 하는 경이감을 느꼈다.
특히 ‘네 마리 백조의 춤(Pas de Quatre)’은 작은 동작 하나라도 어긋나면 모두가 흐트러지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마친 뒤 터져 나오는 관객들의 “브라보!” 소리는 무대의 정적과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마지막에 주연 발레리나가 32회 푸에테(Fouetté)를 깔끔하게 마치면, 극장을 가득 메웠던 긴장감이 한순간에 터지며 폭발적인 기립박수가 쏟아진다.
러시아 발레는 개성과 더불어 완벽한 앙상블을 추구하기로 유명하다. ‘32마리 백조’가 팔 동작과 시선까지 일제히 맞춰 한 몸처럼 흐를 때, ‘이것이야말로 러시아 발레의 정수’라는 생각에 누구나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것이다.
_ ‘32개의 튀튀, 하나의 호흡_ 발레 군무의 대서사시를 찾아서’ 중에서
나는 미술관에서
도시를 읽는다
“지도가 아닌, 그림 속에서 도시를 만난다”는 저자는 거리보다 미술관에 오래 머물고, 그림 앞에서 도시의 얼굴을 기억한다.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의 레이덴 출신이다. 레이덴은 16~17세기 학문과 인쇄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하며 당대 유럽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활발히 교류하던 도시였다. 렘브란트는 젊은 시절부터 명암 대비가 뚜렷한 독특한 기법으로 주목받았다.
렘브란트의 청년기 자화상은 생각보다 작은 크기이지만, 그 속에 담긴 에너지가 범상치 않다.
도슨트가 말한다. “이 그림은 크기가 작아요. 그런데 가까이 들여다보면 렘브란트 특유의 빛과 그림자 배치가 놀라운 입체감을 만들어냅니다. 머리카락 쪽만 조명을 받은 듯 환하게 비추고, 반대쪽 얼굴은 어둠 속에 살짝 감추었죠. 이렇게 ‘부분적인 밝음’으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방법이 바로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의 핵심이에요.”
도슨트의 말처럼, 곱슬거리는 금발이 빛을 받으며 실감 나게 표현된 반면, 반대편 그림자의 영역에서는 윤곽이 희미해진다. 그럼에도 청년 렘브란트의 눈빛은 강렬하다. 23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그 눈에는 야망과 호기심이 뒤섞여 있다. ‘나는 앞으로 어떤 길을 가게 될까?’, ‘세상은 내 재능을 알아줄 것인가?’와 같은 질문이 화면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듯하다. 붓 자국은 섬세하기보다는 과감하고,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구도가 이미 ‘명암의 대가’가 될 미래를 예고한다. 이 작은 자화상 속에서 미래의 거장이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_ ‘시간의 자화상, 화가들이 거울에 비친 자신을 만나다’ 중에서
기억의 풍경,
다큐멘터리로 걷다
“카메라가 지나간 자리에는 늘 침묵이 남았다. 사라진 장면은 내 안에서 다른 형태로 계속 재생되고, 그 기억들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한다.”
촬영을 마치고 언덕 끝에 섰다. 태양빛 하늘 아래 태평양은 여전히 푸르고, 묘비는 풀숲 사이로 조용히 얼굴을 내민다. 120년 전, 이 섬에 닿았던 사람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바다를 건넜지만, ‘조국을 되찾겠다’는 마음만은 함께 나눴을 것이다.
이화여대 아카이브에 남아 있던 메리 김 함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어머니는 설령 가난해도 한국어만은 꼭 배우라고 하셨어요. 3월 1일이 되면 모두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쳤죠.” 누군가는 손에 쥔 동전 하나까지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탰다. 그렇게 심어둔 한글 이름과 작은 흔적이, 지금도 묘비 위에 남아 후손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묘비를 잠시 바라보다가, 바람이 더 세게 불어도 이 돌덩이가 쉽게 쓰러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안에 새겨진 이름과 120년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단단했다.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이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역사란 결국 기억의 문제다. 누군가 기억하고 전하지 않으면, 아무리 위대한 이야기라도 세월 속에 묻혀버린다. 다큐멘터리 〈나의 아버지, 하와이 대한인(大韓人)〉. 어쩌면 그것은 역사의 빈틈을 메우려는 작은 시도일 뿐이지만, 누군가는 이 영상을 보고 다시 묘비를 어루만져 줄 것이다. 그리고 120년 전 바다를 건너온 이들이 남긴 삶과 흔적은 하와이 언덕을 감도는 바람 속에서 여전히, 조용히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_ ‘부서진 비석에서 찾은 역사, 바람은 기억을 지우지 않는다’ 중에서
존재와 이별,
예술의 마지막 목소리
“무덤은 삶이 스쳐간 자리가 아니라 예술과 사랑이 마지막으로 숨 쉬는 공간이다. 나는 그 침묵 앞에 오래 멈춰 선다.”
아침 일찍 아를에서 제일 먼저 발걸음을 옮긴 곳은 고흐의 노란 집터이다. 안타깝게도 집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론강의 다리들을 폭격하던 중 노란 집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론강은 그 집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있다. 그 론 강둑에서 고흐는 평화로운 밤 풍경을 캔버스에 담았다. 바로 그 유명한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이다. 1888년의 평화로운 풍경이 1944년 파괴되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모습을 간직했던 〈노란 집〉은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그날 저녁, 나는 론강을 카메라에 담았다. 수많은 포탄이 떨어졌을 풍경은 평화로운 일몰을 머금고 있었다. 자연스레 오르세 미술관에서 만났던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과 일몰의 론강이 겹쳐졌다. 내가 방송 제작 시 선호하지 않는 편집 기법인 ‘디졸브’가 아주 느리고, 깊게, 10초 간 효과를 넣고 있었다.
론강을 뒤로하고 고흐의 대표적 야경 작품 중 하나인 〈밤의 카페 테라스〉의 ‘그 카페’를 찾았다. 필수 관광 코스가 된, 의미가 좀 퇴색된 카페는 임시휴업 중이었다. 야경 작품을 다룰 때 고흐가 흔히 그리는 ‘이 빛나는 밤하늘’은 독특한 색채 사용과 감정적 표현으로 그의 내면세계를 반영한다. 고흐에게는 위안과 영감의 원천이었으며,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모티프로 자주 등장한다.
_ ‘빛과 고독, 광기의 여정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시작하다’ 중에서
저자는 이 책은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지 않아도 좋다고 말한다. “어떤 날에는 음악이 필요할 수도 있고, 어떤 날에는 그림 한 장이, 또 어떤 날에는 오래된 이름 하나가 마음을 붙잡을 수도 있다. 읽는 이의 감정이 이끄는 대로 펼쳐도 좋다. 어쩌면 그날의 감정이 가장 잘 들어맞는 장면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