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정신을 열어젖힌 위대한 사상가
프랜시스 베이컨이 예리하게 포착한 시대의 풍경
수필이라는 문학 장르를 선구한 작품집
프랜시스 베이컨에게는 여러 수식이 따라붙는다. 먼저, 그는 스무 살에 처음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오랫동안 정치인으로 살았다. 동시에 대법관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한 법률가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근대정신을 열어젖힌 위대한 사상가였다. 베이컨은 자연을 주어진 것으로 보지 말고 관찰, 실험, 연구의 대상으로 보자고 촉구했다. 이를 통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확립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귀납적 관찰 방법은 이를 위한 수단이었다. 베이컨이 열어젖힌 근대정신은 생태주의 등의 사상이 등장해 도전에 직면하기까지 수 세기 동안 유럽을, 나아가 세계를 지배했다. 그리고 여기, 프랜시스 베이컨의 또 다른 이름이 있다. 바로 수필가다.
《베이컨 수필집》은 베이컨이 삼십 대 중반일 때 처음 발표한 후, 그가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여러 차례 개정해 다시 펴낸 책이다. 공직 생활 및 학문 활동에 매진하던 시기부터 원숙한 경지에 다다른 때까지, 그 누구보다도 시대를 날카롭게 감각하고 관찰한 베이컨 사유의 정수가 담긴 책인 셈이다. 이 책이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을 대표하는 산문으로 손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몽테뉴와 함께 수필 장르를 확립한 베이컨
간결하고 교훈적이며 분석적인 수필 형식의 효시
총 59편의 글이 실린 이 책은 인간, 자연, 세계를 파악하는 베이컨의 예리한 시각이 도드라지는 고전적인 산문들로 채워져 있다. 베이컨은 때로는 환자를 진단하는 의사의 자세로, 때로는 사건을 심리하는 법관의 자세로, 때로는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과학자의 자세로 인간사의 관심과 문제, 현상을 진단하고 설명한다. 베이컨은 진정 과학적 낙관론을 근간으로 하는 시대정신을 대표한 당대인이자, 수 세기 동안 유럽을 지배한 과학적 합리주의의 예언자였다. ‘정원 가꾸기’부터 ‘제국의 경영’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관심사에 대한 베이컨의 서술은 독자에게 그가 살던 시대의 풍경과 그 시대의 요체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베이컨은 미셸 드 몽테뉴와 함께 수필 문학의 창시자로 널리 인정받는다. 몽테뉴가 자아, 인간성, 죽음, 습관 우정과 같은 주제에 천착하며 사유의 흐름을 자유롭게 펼쳐냈다면, 베이컨은 정치, 심리, 권력 등 실용적이고 공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글쓰기 스타일에서도 간결하고 교훈적이며 분석적인 형식을 취해 사색적인 몽테뉴와 대비를 이루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창안한 서로 다른 수필의 길은 지금까지도 수필 작가들이 따르는 양 갈래 길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베이컨의 세계를 살고 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맛보는 사유의 기쁨
현재를 사는 우리는 베이컨의 시대를 객관화해서 볼 수 있고, 이는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시대를 초월하는 베이컨의 통찰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한계에 갇힌 베이컨의 사유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지적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베이컨은 군주제야말로 인간성에 본연적으로 부합하는 제도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귀족주의를 옹호했다. 이외에도 이 책에는 제국주의와 엘리트주의, 자연 지배 등 오늘날 거센 도전과 비판에 직면한 사유의 단편이 엿보이는 글이 많다. 이 말은 오늘날 베이컨의 패러다임이 위기를 맞았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우리가 여전히 베이컨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훌륭한 대비와 짜임새, 표현상의 절제와 빛나는 경구로 특징되는 베이컨의 빛나는 문장들은 지금도 ‘시의성’을 잃지 않고 독자에게 말을 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