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런 가난한 얼룩,
천진한 검댕에 따스한 동경을 느낀다.”
일상에서 포착한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
찰스 램이 45세 때부터 월간지 《런던》에 연재한 수필들로, 제1집과 제2집으로 출간된 열일곱 편의 작품을 엮은 책이다. 단순한 일상의 관찰을 넘어서 삶과 죽음을 대하는 철학적 사유를 담아낸 그의 수필들은 영국 수필 문학의 백미로 손꼽히며 지금까지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읽히는 고전이 되었다.
“사람마다 생일이 두 번 있다”라는 흥미로운 문장으로 시작되는 작품 〈제야(除夜)〉에서는 새해 전날 밤, 새해의 시작을 기뻐하기보다는 지나간 시간과 죽음을 묵상하는 역설적인 접근이 인상적이다. 삶과 죽음, 시간의 흐름, 존재의 덧없음에 대한 램의 깊은 사색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굴뚝 청소부 예찬〉은 램이 살던 시대에 최하층 계급이었던 굴뚝 청소부 아이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따뜻한 시선과 유머로 그려낸 수작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따뜻한 인간애, 계급과 위선에 대한 풍자, 불평등과 열악한 아동 노동의 현실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꿈속의 아이들-백일몽〉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램이 상상 속의 두 자녀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몽환적인 분위기의 작품이다. 램 자신이기도 한 이 작품의 1인칭 화자는 유년 시절, 가족 이야기, 사랑했던 여성, 형에 대한 기억 등을 아이들에게 들려주지만, 결국 아이들은 꿈속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지며 깊은 슬픔을 남긴다. 이 작품의 결말은 영국 수필 문학사에서 가장 애틋한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고기 요리의 기원을 고대 중국 전설로 꾸며낸 유쾌한 패러디로 찰스 램 특유의 유머와 상상력이 폭발한 작품 〈돼지구이를 논함〉은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의 예로 널리 인용된다. 인간 문명의 시작과 그 안에 담긴 우연성, 탐닉, 어리석음, 그리고 즐거움을 익살스럽게 그려냈다. 가볍지만 철학적이고, 풍자적인 이 작품은 ‘먹는 행위’의 문학적 가능성을 보여준 램의 대표작이다.
“나는 바보를 좋아하오.”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길어 올린
절제된 자유로움과 해학, 유머 속에 깃든 페이소스!
램은 가족사의 비극을 겪은 뒤, 평생 독신으로 누이를 돌보며 살았다. 그는 S. T. 콜리지, C. 로이드 등 여러 시인과 교우하면서 시인으로 등단했고, 누이와 함께 《셰익스피어 이야기들》, 《율리시스의 모험》 등 어린이들을 위한 작품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찰스 램 수필선》은 그의 필명인 ‘엘리아’에서 따와 ‘엘리아의 수필’로 일컬으며 그에게 불멸의 문필가라는 명성을 안겨주었다.
램의 글은 어떠한 목표 없이 마음에서 떠도는 언어의 방랑이 아니라 한 가지 생각을 오로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무던히 전개해 나가기 때문에 단순하고 직관적이다. 그의 수필은 주제를 간결하면서도 가볍게 다루지만 경박하지 않고, 자유로우며 진솔하다. 무엇보다 필자 자신의 생각을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고, 결코 독자를 토론의 광장으로 끌어들이지 않는다. 단지 지혜와 재치, 설득력 있는 문장으로 자연스러운 공감을 일으킨다.
램의 수필에는 물론 자전적인 면이 농후하게 나타난다. 빈곤했던 어린 시절, 학창 시절의 방랑, 누이와의 휴가, 지난했던 직장 생활, 교우 관계 등을 글에서 다룬다. 또 자신의 부족한 면들, 이를테면 말을 더듬는 것이나 음치라는 점, 작은 키와 볼품없는 외모, 상식에 대한 무지 등을 진솔하게 드러낸다. 자신의 일상에서 발견한 다양한 이해와 감정에 철학적 사색을 더해 따뜻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우리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메마른 세상에 사랑의 사자(使者)로 왔다 간
한줄기의 큰 빛, 찰스 램의 생애와 주옥같은 작품들
찰스 램은 1775년 영국, 아버지가 법률사무소의 사서로 일하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는 곤궁한 집안에서 일곱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형제들은 대부분 어려서 죽고, 형 존과 누이 메리만 살아남았다. 노쇠한 아버지는 치매를 앓았고 어머니 역시 고질병을 앓아 집안 분위기는 늘 암울했다. 형 존은 그나마 형편이 좋은 편이었으나 가족과 떨어져 따로 살았기 때문에 부모님과 찰스, 메리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러던 중 1796년 정신질환을 앓던 메리가 발작을 일으켜 어머니를 살해하는 끔찍한 비극이 일어난다. 그 뒤로도 메리의 발작 증세는 계속 이어졌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부터는 찰스가 누이를 돌보며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찰스는 자신에게도 정신질환의 유전적 요인이 있을 것이라 여겨 결혼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하는데, 비극적인 가족사로 실의에 빠지기보다는 오히려 꿋꿋한 마음과 깊은 사랑으로 누이를 위해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헌신했다.
물론 찰스 램이 결혼도 하지 않고 정신질환을 앓는 누이를 위해 일생을 바친 것은 놀랍고 훌륭한 일이 분명하지만, 그러한 사실만으로 램의 특질을 단언하거나 평가할 수는 없다. 또한 문인으로서 그에 관한 기록도 변변치 못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전반적으로 흐르는 정서는 희망보다는 체념, 기독교적인 불멸과 구원에 대한 바람보다는 죽음에 대한 혐오가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그는 유머를 즐겨 쓴다. 그의 유머는 인간에 대한 동정심과 탁월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심신의 활력을 북돋아주는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 유머 속에는 짙고 강하게 배어나오는 애수가 깃들어 있다. 마치 울지 않으려고 웃고 있는 사람처럼, 감추어지지 않는 비애를 웃음으로 승화시킨 그의 글에서 인생의 큰 고비를 넘긴 인물의 담대함과 관대함을 느낄 수 있다. 램의 글에 담긴 웃음과 눈물은 곧 모든 인간에 대한 깊고 뜨거운 사랑이기에 시대를 넘어 진한 감동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