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변곡점 ‘3·11’
저자는 2011년 이후 특파원 재직 3년간 지켜본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를 연상케 하는 정치·사회적 혼돈과 격변의 먼지로 시야가 흐릿한 동란기라 표현했다. 3·11은 일본인들의 불안감을 최대로 키운 사건이었다. 사건 직후부터 2012년 말까지의 일본은 우리의 ‘12·3’ 내란 이후와 같이 새로운 질서의 실체가 뚜렷하지 않은 ‘인터레그넴(권위 부재 기간)’의 상태였다. 그러나 3·11이 몰고 온 지각변동은 네오콘이 집권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사회당 등 민주당을 왼쪽으로 이끌어갈 리더십은 부재한 반면, 오른쪽으로 이끌어갈 에너지는 충만했던 것이다. 결국 3년의 짧았던 민주당의 집권은 실패하고 2012년 말 아베로 대표되는 신보수주의와 역사수정주의를 정체성으로 한 정치그룹이 전면에 나서고 만다.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1990년대 걸프전 이후 국제사회에서 위기를 맞은 일본이 평화헌법에 어긋나는 보통국가론을 주장하고, 과거사 문제를 맞닥뜨리며 불안과 당혹감을 느낀 가운데, 민주당과 사회당 등의 정치세력들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실패하게 된 사정을 고찰하는 것으로 시작해, 이후 본격적으로 신보수주의가 발호하며 일본 사회가 우경화되는 사건과 그 과정을 살펴본다.
우경화의 심리 기제로서의 역사수정주의와 넷우익 그리고 혐한론
젊은 세대 독자들은 실감하기 어렵겠지만, 전후 일본의 번영은 1980년대 말에 절정에 이르렀다. 이때 많은 전문가들이 일본이 곧 미국을 능가할 것이라 내다봤다. 하지만 일본 경제는 이런 예측이 나오자마자 붕괴되었고, 1980년대까지만 해도 코스모폴리타니즘이 대세였던 일본 사회는 일거에 정체성 위기에 휩싸였다. 이 책은 경제 거품이 꺼진 것에 때맞춰 봉인이 해제된 과거사 문제에 직면하게 된 일본인들의 불안과 당혹감 등 1990년대 일본의 혼돈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정치 경제의 혼란은 청년 세대를 직격했다. 격차사회가 청년들을 압박하고, 내셔널리즘과 우익에 귀의하는 청년들이 늘어났다. 만화 같은 서브 컬처가 청년들을 유혹했다. 이 책은 우익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가 역사수정주의를 대중화시킨 과정,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의 교과서 전쟁, 넷우익과 혐한론의 발호 등을 살펴본다. 특히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만화 『전쟁론』이 청년 세대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대동아전쟁을 긍정하고 군대 보유 필요성까지 주장하는 이 만화에 젊은이들이 열광했다. 이제 평화, 민주주의, 고도성장 같은 것은 자신들의 일상과는 무관한 ‘딴 세상’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민주주의, 시민운동, 인권은 학교에서나 접할 수 있는 질감 없는 언어였고, 그런 언어들을 구사하며 ‘멋진 척하는’ 좌파들에게 적의를 품게 되었다. 이 틈을 타 미군에 의해 전전의 역사가 왜곡되었다며‘자학사관’을 벗어나 일본의 근대사를 국민의 자긍심을 높이는 방향으로 다시 봐야 한다는 우익의 움직임이 ‘새역모’로 세력화됐다. 일본군 위안부, 난징대학살 등 과거사 문제를 통해 일본의 ‘과오’들이 드러났지만 일본의 새로운 세대는 그런 과거사를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다. 일본 사회는 지난 잘못을 진지하게 대면하고 성찰하기보다는 내셔널리즘의 프레임을 동원해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탈냉전 이후 일본 좌파의 몰락
2009년 민주당의 집권은 탈냉전 이후 일본의 총체적 보수화 과정의 ‘막간극’에 불과했다. 1990년대 들어 일본은 장기불황이 지속되고 주변국과의 과거사, 영토 갈등이 빈번하게 전개되면서 보수우익의 결집이 이뤄지고 있었다. 중도우파 계열의 민주당 정권이 일본의 진로를 바꾸려면 왼쪽에서 함께 함께 힘을 모을 필요가 있었으나 일본의 좌파정치는 1980년대 후반을 정점으로 존재감을 잃어갔다.
사회당은 집권 가능성은 없었으나 개헌 저지선을 확보함으로써 냉전시기 일본의 ‘호헌 평화주의’를 지키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동서대립의 축약판인 자민-사회당 동거체제 속에서 ‘만년 야당’으로 안주하다, 자민당 장기집권 체제가 금권스캔들로 무너진 1990년대 중반 정계개편 속에서 사회당도 함께 몰락했다. 자민당과의 연립정권을 구성한 뒤에는 미일안보조약, 일장기·기미가요, 자위대 등에 대한 종래 입장을 180도 전환하면서 ‘호헌 평화주의’의 정체성을 상실했다.
언론에서도 국제협조주의 노선의 「아사히신문」 등의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약화됐다. 2002년 북한의 일본인납치 문제가 사실로 확인되자 진보좌파 여론은 충격을 받았다. 2014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이슈화시키는데 적극적이던 「아사히신문」이 제주도에서 군 위안부를 강제연행했다는 요시다 세이지의 주장을 검증 없이 실은 초기 위안부 보도에 대해 잘못된 기사라고 철회한 것은 2차 충격이었다. 언론지형의 전반적 보수화는 결과적으로 아베 장기 독주체제에 적지 않게 기여한 셈이 되었다. 좌파의 총체적 몰락으로 1990년대 후반 본격화한 역사수정주의와 우경화에 대항할 정치·사상적 진지는 사라졌다.
3·11과 네오콘 세력의 전면화
1990년대 탈냉전 이후 일본은 정체성 위기에 휩싸였다. 냉전 구조가 해체되면서 국제사회의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불안감이 일본인들을 휘감았다. 동아시아에서 반공동맹이라는 국제 정치적 전선이 사라지자 봉인됐던 과거사의 책임을 묻는 흐름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대두되면서 과거사 사죄와 반성, 청산 없이 구축된 일본의‘폐쇄된 평화주의’의 위선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위안부 문제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 차원을 넘어 ‘전시 성폭력’ 문제라는 국제사회 공통의 어젠다로 승격됐다. 과거사가 가져온 충격은 일본 내 보수우익들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의 국수적 내셔널리즘은 이런 정체성 불안 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2002년 북한의 일본인 납치 인정은 가해자 일본을 피해자 지위로 둔갑시켰는데 아베는 이 과정에서 신보수주의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또한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중일 분쟁, 한국과 독도 영토 갈등 등을 일으키며 ‘강한 일본’을 희구하는 열망을 확산했다.
일본은 3ㆍ11 앞에 무기력했다.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일본이 가진 위상이 한순간 무너져내렸다. ‘작고 안전한 나라’라는 새로운 미래상이 제시되고 원전 마피아를 비판하며 탈원전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분출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목소리는 곧 아베로 대표되는 복고적 성장주의와의 대결에서 패배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민주당은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려 했지만 미국의 견제로 좌초했고, 재난 수습 과정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3년 3개월여 만에 정권을 내놓아야 했다.
『네오콘 일본의 탄생』은 재집권한 아베가 ‘총리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평화헌법을 무력화한 과정, 종전 7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본이 더이상 타국에 사죄하지 않겠다’는 선언의 의미를 한·일 관계 차원에서 검토한다. 2015년 가이드라인으로 불리는 미·일 방위협력지침 개정과 그 후속 조치인 안보 법제 제·개정 등이 일본을 ‘스스로의 판단으로 전쟁을 개시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었음을 짚어본다. 일본의 전략국가화를 꾀한 아베가 ‘인도-태평양’이라는 지정학적 구상을 창안한 과정과 그 의미를 ‘미·일 동맹’ 강화라는 문맥에서 고찰한다. 이와함께 일본이 최근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반도체 산업 부흥 전략을 강제 안보와 함께 한·일 관계 맥락에서 검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