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시간은 단 3개월,
기억을 잃은 사형수의 무죄를 밝혀라
상해 치사죄로 약 2년간 복역한 끝에 석방된 청년 미카미 준이치는 사회에 복귀하자마자 차디찬 현실에 좌절한다. 부모님은 피해자 유족에게 배상금을 지급하기 위해 빚더미에 올랐고, 형의 범죄로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된 동생은 집을 나가 홀로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앞날이 막막한 준이치의 앞에 복역 시절에 그를 온정적으로 대해 줬던 교도관 난고가 찾아온다. 퇴임을 앞둔 난고는 익명의 독지가가 거액의 보상금을 걸고 제안한 일을 같이 해 보지 않겠느냐고 권한다. 그 일이란, 자신의 범행을 기억하지 못하는 한 사형수의 무죄를 입증할 증거를 찾는 것이었다. 문제의 인물은 전과자를 관리하는 보호사를 잔혹하게 살해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기하라 료였다. 미결수로서 구치소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두려움에 떨던 그는 사건 당일 입은 외상 때문에 범행에 대한 기억이 없었는데, 근래 들어 어떤 단편적인 기억을 떠올리고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사형 집행까지 남은 시간은 단 3개월, 준이치와 난고는 사건의 발단부터 되짚어 나가며 료가 기억해 낸 ‘13계단’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려 한다.
인간은 과연 갱생할 수 있는 존재인가?
사형 제도와 현대 범죄 관리 시스템을 다룬 문제작
거의 30년간 집행 사례가 없어 실질적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되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2022년까지도 실제로 처형이 이루어지며 사형 제도가 유지되고 있는 국가다. 이 작품은 전통적으로 교수대를 상징하는 13계단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가져오는 데 그치지 않고 선고에서 집행까지 열세 단계, 열세 명의 관료를 거치는 사형 제도의 실상을 낱낱이 드러낸다. 내각 개편 같은 정치적 상황과 여론이 사형 집행에 끼치는 영향과 모호한 사면의 기준, 더 많이 살해할수록 재판과 행정 절차에 의해 생명이 연장되고 마는 모순처럼 제도를 둘러싼 이슈를 총체적으로 짚어 나간다. 그와 동시에 사형수가 죽음을 기다리며 느끼는 공포와 형을 집행하는 교도관의 트라우마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교도관인 난고는 재직 시절 사형 집행에 임하던 순간 ‘절대 응보야말로 형벌의 근본 이념’이라는 칸트의 말을 되새기려 하지만 눈앞에서 사형수가 느끼는 섬뜩한 공포와 개개인의 갱생 여부가 제대로 고려되지 않는 사례를 목격하며 제도에 회의를 느낀다. 한편으로 『13계단』은 ‘갱생’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한다. ‘개전의 정’이란 걸 정말 남이 판단할 수 있을까? 죄를 저지른 인간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지를 겉으로 판단 가능한가?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이지만 범행에 대한 기억이 없는 사형수, 성실하게 사회에 복귀하거나 혹은 범죄의 악순환에 빠지는 전과자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이 법과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간과되고 있는 현실을 고찰하게 한다. 란포상 심사위원이었던 미야베 미유키는 이 책의 저변에는 “사회에 대해 어떠한 부채를 지닌 인간이 이를 짊어진 채로 사회(혹은 타인)를 위해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고 해설에서 밝혔다. 『13계단』은 전문 수사관이 아니라 죄의 무게를 누구보다 가깝게 느끼며 살아가는 두 인물을 통해 독자와 사회에 묵직한 의문을 던지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