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 류영모, 사유로 그린 한글
삶과 깨달음, 우주의 원리를 한글로 풀어내기 위해 평생을 궁리한 철학자 다석 류영모는 한글을 사유의 도구로 삼아 독창적인 표현의 가능성을 탐구했다. 다석은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단순한 문자의 틀로 보지 않았다. 그것을 의미의 조각으로 보고, 자신만의 해석과 뜻풀이를 바탕으로 ‘한글 그림’이라는 조형 언어로 표현했다.
다석의 한글 그림은 한글 창제 원리를 재구성한 것으로, 뜻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 글자의 시각성을 이용했다. 서구 타이포그래피가 조형적 실험을 통해 ‘글자성’을 획득했다면, 다석의 타이포그래피는 한글이 가진 역(易) 사상에 자신의 깨달음과 의미를 녹여 새로운 한글 형태를 창조한 것이다. 선형적인 문장이 언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면, 시각적인 그림은 언어적 의미 외에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이는 시각적이며 현대적일 뿐 아니라 타이포그래피의 새로운 방법으로, 독보적 타이포그래피 실험이라 할 수 있다.
다석은 자기 생각과 철학을 표현하기 위해 한글이나 한자를 쓰고 그 옆에 주석을 달듯이 내용을 설명하는 한글 그림을 그려 넣었다. 글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 문장만으로 전달하기 어려운 자신의 철학적 사상을 나타낸 의미의 설계도를 남긴 것이다.
다석은 우주와 세상과 인간을 설명하는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기호로 한글이 적합하다고 여겼다. 조사, 부사, 형용사 등을 생략하고 동사, 명사만을 쓰거나 핵심적인 한 글자를 사용해 한글의 의미를 더욱 또렷하게 전달하고자 했고, 쪽자의 속뜻을 끄집어내 의미화하고, 쪽자와 글자를 붙이거나 반복해 의미를 강조하거나 변형하고, 글자 속의 글자를 넣기도 하고, 공간 속 글자의 위치에 따라 의미를 다르게 가져가기도 하며, 하나의 글자가 가로세로로 몇 번 다시 읽히거나, 쪽자나 글자 혹은 문장 전체를 맞대어 반복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다석이 중요하게 생각한 가온찍기를 보면 ㄱ과 ㄴ의 창제 원리를 바탕에 두고 자신의 철학적 생각을 더해 생각의 기호를 지어낸 것이다. 다석은 자신의 깨달음을 형태에 반영해 조형을 창조해 나갔다. 그리고 매일 자기 생각을 따라 항해일지를 기록하듯이, 1,300수의 한시와 1,700수의 시조를 담은 『다석일지』를 남겼다.
다석 류영모의 한글 그림을 통한 타이포그래피적 해석
『다석 류영모의 한글 타이포그래피』는 다석의 한글 그림을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낸 예술서다. 다석 류영모의 일기 『다석일지』를 타이포그래피 관점에서 해석한 이 책은 다석 류영모의 조형적 시각 언어를 매개로 철학과 디자인, 언어와 형상이 어우러진 타이포그래피의 새로운 표현 방법론을 제시한다. 이는 다석의 ‘한글 그림’의 조형적 특징을 분석하고, 디자인의 바탕을 확장하는 새로운 접근이다. 또한 철학과 디자인, 기록과 해석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석의 한글 그림은 미학적 시도를 넘어, 타이포그래피의 본질을 되묻게 한다. 요컨대 이 책은 다석의 타이포그래피 해석을 통해 한글 속에 담긴 깊은 가치와 철학적 사유를 드러내며, 그 자체가 한글의 가능성과 풍요로움을 확장하는 시도이다.
다석의 사상을 다루었던 지금까지의 철학서와는 달리 저자 황준필은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지평을 넓히고자 한글에 깃든 다석의 철학을 현대 시각 디자인 언어로 해석한다. 자칫 어렵게 다가설 수 있는 다석의 철학과 사유를 ‘타이포그래피’에 맞추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재구성하고, 다석의 한글 그림에서 철학적 함의를 추출해 한글 타이포그래피라는 조형 언어로 설명한 것이다.
저자는 다석의 한글 그림 표현을 현대적이고 시각적이고 직관적인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으로 바라봤다. 선형적인 구조에서 벗어난 글자들의 시각적 중첩 현상, 가로쓰기와 세로쓰기를 섞은 자유로운 구도나 읽는 방법이나 순서에 따른 함축적 의미, 위치에 따른 입체적인 변화, 낱말의 배치를 통한 글자 공간 등의 요소로 타이포그래피의 시각적 확장을 꾀했다.
저자의 이러한 시도가 단순히 한 사상가의 철학을 디자인으로 옮긴 것을 넘어, 표현의 도구로서의 한글 디자인, 창의적 영감의 원천으로서의 타이포그래피를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하듯이, 『다석 류영모의 한글 타이포그래피』는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지평을 넓히고자 하는 이들에게 필독서가 되고, 디자인과 철학, 언어와 조형을 잇는 새로운 고리로 자리매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