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낱 종이 묶음이었던 일기장이 어느 날 내게 말을 걸었다
“너는 가고 있다, 하고 있다, 살고 있다”
“돌아보면 어떤 곳에 살든 발밑이 따뜻하거나 평평했던 적이 드물었다.” 박문영 작가가 그간 소설에 담아낸 세상은 자주 냉기가 감돌고, 믿었던 사람은 위로와 고통을 번갈아 주며, 뜻밖의 상처가 일상을 무너뜨린다. 현실의 박문영은 그럴 때 일기장을 펼치고 숨을 쉬었다. “나를 역할 정도로 끊임없이 기록했다. […] 손에 펜이 없다면 다른 걸 들게 될까 봐 겁이 난 걸까.” 내가 여기 살아 있다고 발버둥친 흔적은 일기장 군데군데 좌표로 남아 마침내 긴 궤적을 그렸다.
일기장은 그런 매 순간을 묵묵히 지켜보고, “인격이 없는 주치의”가 되어 말을 걸어왔다. 어느 날 일기는 오늘의 인상적인 사건을 한 가지라도 알려달라고 채근한다. 어떤 날 일기는 작가를 홉떠 보며 아픈 말을 한다. 또 다른 날 일기는 그런 건 좀 걱정하지 말라는 듯 하품을 한다. 그리고 일기는 담담히 속삭인다. 너는 가고 있고, 하고 있고, 살고 있다고. ‘나’를 주어에 두고 내면을 파고드는 일기, ‘일기’를 주어에 놓고 ‘나’와의 건강한 거리감을 회복하는 에세이가 서로를 마주하는 이 책이 어느덧 왕성해진 일기 에세이 시장에서 특별한 자리에 놓이는 이유다.
해가 좋은 날, 일기는 우쭐거리며 머리통을 쓰다듬는다. “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더 잘했다. 할 수 없다고 여겼는데 해냈다.” 먹구름이 낀 날, 일기는 팔짱을 낀 채 나를 홉떠 본다. “너는 세심하고 주도면밀하다. 꼼꼼하고 음흉하다. 상냥하고 겉과 속이 다르다.” 그리고 아주 많은 날, 일기는 담담하게 읊조린다. “너는 가고 있다. 너는 하고 있다. 너는 살고 있다.” 그래. 나는 가고 있다. 나는 하고 있다. 나는 살고 있다. 도망친 일벌처럼 지낸다 해도, 일하지 않는 벌 역시 그저 벌이듯이.
어떤 감정은 손으로 적어낸 뒤에야 비로소 지상에 내려앉는다
일기, 나의 일부와 둘레를 돌보는 시간
별것 아닌 것도 한껏 부풀려 내보여야 하는 자기 광고의 시대, 일기라는 문학은 독특한 위치에 있다. 글과 그림이 생계수단인 박문영 작가에게 일기는 “출간될 리 없고, 될 수도 없으며, 그래선 절대 안 되는” 것이기에 더 간절했다. 일기장에는 어떤 얘기든 마구 떠들어댈 수 있다. 발이 없어, 어디에도 가지 못할 테니. “그는 세상 누구도 모를 나의 속도전을 물끄러미 지켜본다. 트랙이 비워지면 비워지는 대로, 채워지면 채워지는 대로. 나약한 나와 취약한 일기. 우리는 서로에게 뜨겁게 무심하다.”
일기 쓰기는 오직 일기장과 나, 둘 사이에서 은밀하게 진행되는 일이기에, 때로는 남의 의심스런 눈초리를 받기도 한다. 도대체 혼자 뭘 그렇게 쓰는 거야? 데스노트라도 만드나?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일기는 “‘나’라는 임시적이며 유한한 렌즈가 포착한 굴절의 풍경을 빈 지면에 쌓는 것”, 어쩌면 “편향과 왜곡의 기록”일 수 있다. 그러나 박문영 작가는 말한다. “하루를 자잘하게 닦다 보면 종종 세상을 감각하는 창이 같이 닦일 때가 있다”고. 아무리 시시하고 쪼잔하고 위선적인 이야기로 채워진다 해도 일기는 결국 그런 나를 돌아보는 거울이 되고, 바깥으로 향한 안테나를 곧게 바로잡아준다.
중요한 건 스스로에게 말 걸기를 멈추지 않는 것. 세상이 아무리 괴롭혀도 차가워지지 않는 것. 그래야 이 요란한 땅에 발을 단단히 디디고 살 수 있지 않을까. “매일 읽고 쓰고 움직이는 것만이 내가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최소한의 실재적 방식이라는 사실을 체감한다. 이 작은 행위가 나를 방임하지 않고 나의 일부와 둘레를 돌보는 일이라 추측한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더라도 가까스로 하나다”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일기장의 시선을 느끼며, 그렇게 일기는 계속된다
‘일기(日記)’라는 단어 자체에서 드러나듯, 일기는 하루 단위로 초기화되는 과업이다. “살아 있는 동안 일기를 꾸릴 기회가 24시간 단위로 생성된다”는 것은 인생을 신선하게 해줄 새로운 바람처럼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은근한 부담이기도 하다. 새 일기장을 장만하려다 문득 쓰다 만 일기장이 떠올라 주저한 기억, 다들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
“중세 소작농이 길드에 감자를 납품하듯” 묵묵히 일기를 쓰는 박문영 작가도 일기를 멈춘 날들이 있다. 그런 날의 빈 페이지도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쓰이지 않은 일기는 공백을 통해 뒤늦게 말한다. 이때의 나는 슬펐다. 허약했다. 어쩔 줄을 몰랐다.” 그렇게 촘촘하고도 느슨하게 이어진 그의 일기는 이제 막 시작할 소설의 씨앗(「가지치기」)이 되기도 했고, 반드시 건네야 했던 고백을 조금쯤 수월히 할 디딤돌(「겨울 이별」 1, 2)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창작의 선행 도구로서 일기의 유용함에서 나아가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매일매일 성실히 쓰는 행위 자체다. “세상의 큰 말은 언제나 작은 말로 엮여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일기 쓰기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한 다짐을 책 곳곳에 심어두었다. 그리고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권한다. 일기를 써보라고. 쓰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그때 일기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를 지켜보는, 꼭 나를 닮은 서로의 동맹 관계가 되어줄 것이다.
“그저 나만큼의 나를 담아낸 기록, 그러므로 나에게서 아주 도약하지도 비상하지도 않은 이야기. 활자와 나는 서로를 데면데면 쳐다본다. 지친 우리는 서로 경쟁할 생각이 없다. 공격할 의지가 없다. 나는 너의 결점을 안다. 너도 나의 결점을 안다. 나는 너의 강점을 안다. 너도 나의 강점을 안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하나가 아니더라도 가까스로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