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수필문학과 수필론의 선구자로서
한흑구 수필문학의 사상과 특질
한흑구 문학 연구서 제3권으로 『한흑구 수필문학의 사상과 특질』을 펴낸다. 앞서 나온 연구서 1권, 2권에서도 ‘수필가 한흑구’의 문학적 면모를 부분적으로 다루긴 했으나, 이번 책의 에세이 4편은 모두 그의 수필문학 연구와 분석에 집중한 글들이다. 방민호의 「한흑구 수필의 형식미와 예술성」, 신재기의 「시적 수필의 균열: 1970년대 한흑구 수필 읽기」, 이희정의 「한흑구 수필의 철학적 사유 분석: ‘매체’와 시대적 변화 양상을 중심으로」, 김종헌의 「한흑구 수필관의 형성 과정과 창작에의 실천」 등이 그것이다. 연구자의 시선을 그의 수필에 맞춘 의도는 무엇보다 일제강점기에 시, 소설, 평론, 수필, 영미문학 번역 등 장르를 넘나든 문학인이었던 한흑구가 그때부터 수필론 정초(定礎)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며 수필문학 개척에 돋보이게 앞장섰다는 사실과, 해방 후 수필 창작에 문학적 주력을 기울임으로써 수필가 이양하, 피천득, 김진섭 등과 함께 우리 수필문학의 예술적 경지를 열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방민호는 「한흑구 수필의 형식미와 예술성」에서 한흑구 수필문학은 이론적, 방법론적 기초를 가진다는 점, 문학사상에 입각해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수필적 예술미의 가장 높은 경지를 개척해서 구현한 점 등에서 다른 수필가들과 구별하게 되는 특질을 지닌 것으로 평가한 다음, 한흑구 수필문학의 형식미와 예술성에 관하여 그의 수필론과 작품을 통해 입증하고 시적 수필의 예술적 경지를 완성한 그의 수필 「나무」와 「보리」를 각 한 편의 산문시로서 분석하고 있다.
「시적 수필의 균열: 1970년대 한흑구 수필 읽기」에서 신재기는 「나무」, 「보리」를 창작하여 시적 수필의 예술적 경지를 완성한 한흑구 수필문학이 1979년 11월 70세 일기로 타계한 그의 인생에서 노년기라 불러야 하는 60대, 즉 1970년대에 접어들어서 어떻게 산문적으로 풀어졌는가에 대해 통찰하고 있다. 작품의 제재와 주제가 전보다 다양해지고, 글의 길이가 전보다 전반적으로 더 길어지고, 실제 생활에 밀착해서 세상을 읽고 삶의 가치를 탐색하는 창작 태도를 보여주는 ‘수필가 한흑구’의 새로운 면모를 분석하면서 특히 ‘바다’를 주목하고 있다. 생명과 희망의 원천으로서 바다, 인생의 흐름을 비추는 거울로 바라보는 바다, 문학의 창조적 공간으로서 바다가 시적 수필의 균열을 일으키는 한흑구 수필문학의 원천이라는 것을 밝혀준다.
이희정은 「한흑구 수필의 철학적 사유 분석: ‘매체’와 시대적 변화 양상을 중심으로」에서 한흑구 수필문학이 어떠한 매체 속에서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했는가의 양상을 살펴보고 그의 수필에 내재한 철학적 사유의 구조와 성격을 규명하고 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억압적 상황 속에서는 《동광》, 《신한민보》, 《농민생활》 등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한 매체를 기반으로 조국 상실의 비극과 독립에 대한 열망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해방 이후에는 《백민》, 《동아일보》, 《매일신문》, 《현대문학》, 《수필문학》 등 다양한 매체를 기반으로 민족주의적 정서에서 벗어나 자연물에 대한 사유를 통해 인생의 유한성과 존재의 의미를 성찰하는 관조적 태도를 견지한 한흑구의 작품들은 매체의 시대적 맥락과 긴밀하게 호응하고 변화해온 문학사의 한 흐름을 반영하는 귀중한 문학사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담보한다는 것이다.
「한흑구 수필관의 형성 과정과 창작에의 실천」에서 김종헌은 한흑구의 수필론을 발표한 순서대로 따라가며 이론적으로 더 보완된 부분을 찾아내고, 또 그것이 작품에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를 살펴본다. 자신의 수필론을 자신의 수필 창작에 적용하려 애를 쓴 작가로서 한흑구가 해방 이후 발표한 「수필문학론-ESSAY형식의 고찰」(1948)에서 FORMAL 에세이와 INFORMAL 에세이로 구분하면서 경수필과 연수필 개념을 도입하고 시의 주관적 경향과 수필이 상통한다는 논지를 펼치며 수필을 시에 가까운 문학의 형식으로 이해한 점에 주목하는 한편, 한국현대문학사의 초기에 영문학의 에세이를 수용하여 경수필과 연수필로 구분할 뿐만 아니라 베이컨 수필과 몽테뉴 수필의 차이점을 언급하는 데까지 나아갔으나 수필이 시대정신을 가진 비판의 한 축이라는 점을 정의하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지적한다.
책 뒤의 ‘특별자료’ 두 편은 딱딱한 연구서를 읽어내는 독자에게 일종의 서비스로 제공하는 글이다. 먼저 읽어두는 것도 좋을 듯하다. 1909년 평양에서 태어나 자라고 1929년부터 5년간 미국 유학을 하고 돌아와 평양에서 전 조선을 상대하는 문예중심 월간지 《백광》 창간을 주도하고 “단 한 편의 친일문장을 쓰지 않은 영광된 작가”로서 해방을 맞은 한흑구는 그러나 곧바로 조만식이 주선해준 트럭으로 월남하여 1945년 9월 서울 문단에 합류하고는 1948년 늦가을부터 포항에 정착하여 1979년 늦가을에 생을 마치는 날까지 포항 사람으로 살아갔다. 이러한 한흑구의 문학적 약전(略傳)을 알아두고 포항에 와서 그의 명작 수필로 회자하는 「나무」와 「노목을 우러러보며」, 그리고 「보리」를 창작했던 현장으로 찾아가는 발길은 한흑구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는 지름길에 들어선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래서 「한흑구의 문학적 약전(略傳), 그의 명작 수필과 포항의 현장」을 붙여둔다.
「1936년 가을, 평양 문인 좌담」은 1937년 1월 《백광》 창간호 발행을 주도하는 26세 한흑구가 그때 평양 숭실대학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한 양주동, 이효석을 비롯해 극예술연구회에서 활동한 이석훈 등 문학인 8인을 모아 좌담을 진행하고 그 속기록을 다시 정리하여 《백광》 창간호에 좌담 사진과 함께 실은 것이다. 이 좌담에서 흐름을 주도하는 인물은 양주동이고, 이효석은 그저 얌전
해 보이고, 안내 지면에 ‘속기’를 맡은 것으로 표기된 한흑구는 양주동 다음으로 활발히 토의에 참여한다.
이번 세 번째 연구서가 앞서 나온 두 권과 함께 한흑구의 삶과 문학을 비춰주는, 꺼지지 않는 전등과 같은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