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 신유박해와 한국 천주교의 역사
이름 없이 사라진 사람들을 기억하는 이야기
일가친척 하나 없는 떠돌이 소녀에게 세상은 삭막하고 비정한 곳이다. 정이는 양반의 권세에 눌려 누명을 쓰거나 속좁은 어른들에게 배척을 받는 등 온갖 시련을 겪는다. 특히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 복순이에게 배신당하고 멍석말이를 당한 일은 깊은 충격과 상처를 남긴다. 어째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끼리 싸워야 할까? 조선처럼 신분제가 엄격한 사회에서 천민, 고아와 거지, 병자, 정이처럼 불쌍한 이들이 사람대접 받고 사는 일은 영영 불가능한 일일까? 모든 상황이 여의치 않지만 정이가 쉽사리 좌절하지 않는 것은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거지 아이들을 돌보고 이끌어주는 왕초 홍월과 구걸한 밥을 나눠주는 만이,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에게 잔치 음식을 베풀어주는 북촌 마님 등은 정이에게 함께 어울리고 서로 돕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준다.
정이는 북촌 마님에게 글을 배우는 동안, 나라에서 금하는 천주학을 믿는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사랑받을 존재라니, 이보다 더 좋은 말이 있을까. 평생 쓸쓸하고 외롭게 자란 정이에게는 국가의 이념이나 사대부 선비들의 정쟁보다 하느님의 사랑이 훨씬 이해하기 쉽다. 더 좋은 뜻을 위해 모여서 기도하는 사람들과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국가 권력 중 정이가 어느 편에 설지는 분명해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정이가 자신보다 더 어리고 더 연약한 아이들의 보호자가 되어주기로 나서는 것은 필연적인 결말일 것이다.
‘보름 우물’은 지금도 서울 한복판에 석정보름우물터라는 유적지로 남아 있는데, 실제로 신유박해 당시 수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하자 갑자기 물맛이 써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한 작품 속에는 북촌과 명례방(명동)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형성되었던 신앙공동체, 주문모 신부와 강완숙, 정약용 형제 등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들도 대거 등장한다. 그러나 『보름 우물에서 만나』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나 정치적 탄압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이 비통하고 혼란스러운 시기, 열두 살 정이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중심에 놓는다. 천애고아 정이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온갖 시련을 겪으며, 비단 댕기를 쥐고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나선다. 비록 그 끝에는 신분상승을 이뤄줄 출생의 비밀도, 따스한 해피엔딩도 없지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보편적인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이름 없이 사라진 사람들을 기억하는 이야기이자, 그 사랑과 신념이 어떻게 다음 세대로 전해졌는지 이야기하는 묵직한 작품이다. 최근 콘클라베로 주목을 받았던 가톨릭이 한국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동시에 씩씩하고 당당한 주인공과 속도감 있는 전개가 돋보이는 동화로, 고학년 어린이 독자들이 몰입해서 읽기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