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으로 자라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나라를 권한다
《뿌리 깊이, 하나님나라》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주목한다. 전작인 《도시의 하나님나라》가 전혀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에, 그 공동체가 맞이할 재난과 세상의 끝에 《다시 재난, 다시 하나님 나라》가 관심을 두었다면, 베드로전서를 살펴보는 이 책은 지금 이곳에서 누구로 살 것인지에 주목한다. 현대 사회는 당연히 베드로 사도가 살았던 당시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단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도 답이 어렵고 모호해졌다. 그럼에도 베드로 사도의 메시지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그 생명력 때문이다. ”사실 2천 년이 넘는 기독교 역사는 빛으로 나아온 사람들이 이어지고 또 이어진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경험한 빛을 바가지로 덮어 둘 수 없었고(마태복음 5:15), 그래서 제사장 나라라는 사명은 땅끝까지 이르렀습니다.“(230쪽)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이야기가 틀리지 않았음을 2천 년 넘게 증명해 온 셈이다.
문제는 정체성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여러분은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합니다“라며 바로 들어가지 않고, 그에 앞서 제법 길게 ”여러분은 이렇고 저런 사람들입니다“라고 밝힌다. 요즘 사람들 눈에는 ‘이론편’에 가까운 내용을 매우 공들여서 강조한다. 〈뿌리 깊이, 하나님나라〉가 바로 이 전반부를 다룬다. 전반부를 꿰뚫는 키워드는 임시체류자다. 물론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먼저 강조한다. 그런데 그런 여러분의 신분은 임시체류자라며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람이 여기서 영원히 살 것처럼 목매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라이프스타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불일치가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베드로전서 전반부가 제빛을 발한다.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이 진짜 진리라고 믿는 것에 기초한 꿈을 꾸게 되고, 그에 따른 삶을 살게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무언가가 인생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예를 들어,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대신 돈을 진리로 믿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돈을 추구하고 돈에 지배받는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149-150쪽)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행동의 변화나 삶의 궤적이 극적으로 선회하지 않는 이유는 삶이나 행동의 기초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는 그 지점을 정확하게 꿰뚫는다. 그래서 소아시아에 흩어져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우리가 누구인지를 먼저 속속들이 알려 준다. 베드로 사도의 애정 어린 설명을 저자는 다섯 가지 선물과 다섯 가지 명령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알려 준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나라
그런데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진리를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 귀에 닳도록 들은 이야기라서 어쩌면 지레 손사래 칠지도 모른다. 저자는 그 지점을 놓치지 않고 ”주어진 정체성“과 ”확립된 정체성“을 처음부터 구분한다. ”베드로 사도는 실제 삶의 현장에서, 굽이굽이 인생길을 통과하며 ‘확립된 정체성’을 형성한 탓에 흥분과 감격으로 편지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의 정체성은 단순히 지적 동의나 결단에만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전인격적으로 교류하며 일생에 걸쳐 빚어진 것이었습니다.“(26쪽) 주어진 정체성은 ”지적 동의나 결단에만 근거한 것“이라서,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차용한 정도의 신앙인 셈이다. 그렇게 해서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 생성될 가능성이 지극히 낮다. 그렇다면 확립된 정체성으로 넘어가는 다리가 있을까? 뜻밖에도 그 다리는 이 시리즈의 핵심인 ‘하나님나라’로 놓인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를 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를 염두에 두시고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조차 세상의 구원을 생각하고 택하셨습니다. 이러한 맥락을 잃어버리면 기독교는 자신의 구원과 복락만 추구하다가 결국 탐욕적 종교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29쪽)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이 남의 말이나 배운 내용에만 머물고 더 깊어지지 않는 까닭은 개인의 구원과 복락에만 머물기 때문 아닐까? 반대로 말하면, 개인의 구원과 복락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주어진 정체성’에 만족하고 그 자리에서 맴돌게 된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리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된다. 《뿌리 깊이, 하나님나라》는 그 지점까지 우리를 이끈다. 이제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선을 넘어 ‘확립된 정체성’으로 나아갈지, 아니면 있는 그대로 머물지. 임시체류자의 영성은 안전을 욕망하는 현대 그리스도인에게는 큰 도전이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어디가 더 안전한지. 더 오래 지속되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