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길 따라, 인연 따라 쓰인 사연
“저는 부모님 모시고 근근이 살고 있습니다만, 굶어 죽은 시체가 계속 이어지고 있어 장차 살아남는 사람이 없게 생겼으니, 더 말씀드려 무엇 하겠습니까. 매일같이 밥상을 마주할 때마다, 목에 바늘이 걸린 것만 같습니다.”
1671년(현종 12) 2월 13일, 남구만(南九萬)은 아저씨뻘 되는 집안 어른께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남구만은 “동창이 밝았느냐”라는 시조로 익히 잘 알려진 인물이다. 1670년부터 기상이변에 전염병까지 번져 조선 백성들은 전대미 문의 대기근을 겪었다. 경술년(1670년)에 시작되어 신해년(1671년)까지 이어진 이 재앙을 역사는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대기근으로 조선 전역에서 100만 명 가까이 병과 굶주림으로 죽어 나갔다. 함경도에서는 메뚜기 떼가 출몰하여 구황작물까지 송두리째 먹어 치워 버린 탓에 백성들의 피해가 가장 컸다. 이때의 함경도관찰사가 바로 남구만이었다.
“땅속에 장사 지내고 나니 목소리도 모습도 영원히 다시 대할 수 없어, 이 한 몸은 쓸쓸하고 만 가지 일은 아득하기만 하여 문을 닫고 홀로 누워 눈물만 흘릴 뿐이니, 또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1701년(숙종 27) 정월 12일 김창협(金昌協)은 생때같은 외아들을 가슴에 묻고 이렇게 썼다. 그의 아들 김숭겸(金崇謙)은 비록 19세의 나이로 요절했으나 학문이 깊었고 수백 편의 시를 남긴 수재였다.
한편, 간찰의 뒷부분에는 물품을 보낸다는 내용이 자주 발견된다. 중국 사신 맞이에 여념이 없던 홍유구(洪有龜)는 1682년(숙종 8) 2월 18일 간찰을 받는 상대방에게 제수(祭需)를 보내면서 이렇게 썼다.
“왼쪽에 약소하게 쓴 것은 제사의 제수에 보태려고 올려 드리는 것이지만, 이렇게 심히 보잘것없으니 도리어 부끄럽고 한심합니다.
누룩 두 덩이
민어 두 마리
조기 네 두름”
저자는 “간찰에 기록된 주고받는 선물로 이 정도면 매우 거창한 것”이라고 하면서, 선물은 대부분 부채나 달력, 종이나 먹, 고기나 과자 등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조선 선비들의 간찰 문화
저자는, 간찰은 한 시대를 살았던 선비들의 사생활과 가장 밀접한 까닭에 형식과 내용이 무척 다양하다고 하면서, 수신인이 웃어른일 경우 간찰은 해서(楷書)에 가까운 행서(行書)로 정갈히 썼는데, 자식이나 가까운 아랫사람에게 보내는 간찰의 글씨체는 제삼자가 읽기에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흘려 쓰기도 했다고 말한다.
또한 발신인이 상대방과 매우 친근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이름까지 생략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름 두 글자만 쓰면 될 일을 ‘잘 아는 처지에 이름을 생략’한다는 의미로 ‘불명(不名)’이라고 굳이 두 글자를 쓰기도 했다. 심지어 ‘흠(欠)’이라고 쓰는 경우도 있는데, ‘흠!’이나 ‘에헴!’이라는 의성어로써 이름을 쓰지 않는다는 의미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심각한 내용이 담긴 간찰 끝에는 ‘병(丙)’이나 ‘정(丁)’을 써 놓기도 했는데, 병(丙)과 정(丁)은 오행(五行)의 ‘불 화(火)’에 해당하므로 읽은 후에 태워 버리라는 당부였다. 그런데 의외로 이러한 간찰이 심심찮게 발견되는 것을 보면 수신인들이 이를 무시하기도 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