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예술의 요건은 하나다. ‘내 안의 예술’을 일깨워주는 예술, 그리하여 나를 예술과 더불어 살게 하는 예술.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은 또 하나의 예술이다.
_ 시인 이문재
예술은 정녕 그토록 멀리 있는 무엇이란 말인가,
진정 그들만의 리그인가
그래피티아티스트인 뱅크시의 실체를 쫓는 다큐멘터리인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는 현대미술의 아이러니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입소문과 지적 허영, 부자들의 과시에 현대미술의 작품들이 이용된다는 것이다. 과거에도 예술은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돈을 과시하고 싶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건물을 지으려고, 자신의 멋진 시절을 최고의 그림으로 간직하려고 가난한 예술가들의 능력을 착취해온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특정 계층에게 돈이 지나치게 몰리면서 미술작품은 돈 있는 사람들의 투자처이자, 배운 사람들의 지식 과시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예술의 역할이 정말 그뿐일까?
예술은 공부가 아니라 감각하는 것이다
투자도 아니다, 애호가 먼저다
그림을 좋아하는 아버지 덕에 어릴 때부터 미술작품에 둘러싸여 살았던 저자는, 예술은 공부가 아닌 환경으로 접하며 자연스럽게 감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예술과 관련한 활동을 하며, 수많은 작가를 만나고 미술관과 박물관을 다니며 쓴 글들이 이를 증명한다.
_ 미술관에 도착하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잘 알려진 최정화 작가의 생활용품 오브제 작품과 더불어 창원 시민들과 함께 만든 사진이며 기증받은 그릇 설치 작품. 장롱 속 옛날 우리 엄마 사진이 작품이 되고, 케케묵고 오래되고 찌그러진 냄비가 예술이 됐다.(241쪽)
저자에게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특별한 날 이벤트를 위해 가는 곳이 아닌, 생활 속에 언제라도 숨 돌릴 틈이 필요할 때 가는 곳이다. 집에 그림을 거는 일은 화분을 키우는 일처럼 기분 전환을 위한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다.
_ 우리는 알고 있다, 문화나 예술로 어느 날 갑자기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 자전거 타기처럼 배우고 연습해야 한다는 것, 일상 속에서 가까이 자주 누려야 한다는 것. 특히 유년기에 그리해두면 그 경험이 아로새겨져 평생 기억된다.(60~61쪽)
느리게 걸으려고 전시회에 간다
삶의 속도를 늦추려고 예술에 다가간다
예술은 마음이 아플 때, 휴식이 필요할 때, 나의 기분을 표출하고 싶을 때 좋은 매개체가 된다. 전시회에 가 미술작품을 보며 천천히 걷는 동안, 너무 빠르게 달려 원심력에 의해 튕겨 나갈 것 같던 삶의 속도는 느려지고, 마음에는 평안이 찾아온다. 미술작품을 보며 무슨 기법을 써서 그렸고 시대 배경은 어떻고 터치감은 어떤지 따위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천천히 걸으며 만든 이의 마음을 오롯이 느끼면 되는 것이다.
_ 우리가 미술관에 가야 하는 이유는 위대한 예술을 영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가장 느린 속도로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속도를 줄이는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순간 생의 좋은 것이 흘러든다. 그림 한 점이 흘러든다.(6~7쪽)
예술은 부나 지식을 과시하기 위한 도구도, 특정 계층의 전유물도 아니다. 바쁜 일상에, 각박한 사회에, 잠들지 않는 바이러스에, 깜깜한 마음에, 작은 빛 한 줄, 산소 한 모금을 만들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내 마음에 탄력이 필요할 때,
예술은 유용하다
『느리게 걷는 미술관』에는 저자가 예술을 접하며 한 생각(1부. 나를 돌아보다), 작가들을 만나며 느낀 것(2부. 당신을 만나다), 전시회를 즐기는 방법(3부. 그곳에 가다), 예술로 더 많은 사람과 소통했던 추억(4부. 우리를 이야기하다)이 담겨 있다. 저자에게 예술은 삶이자 직업이자, 친구이자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미술작품 하나를 보더라도 무심코 그은 선 한 줄에서 그림을 그리던 작가의 마음까지 오랜 시간 많은 것을 느끼고 기록할 수 있었다.
_ 사진이 감동적인 것은 그 장면이 실재했다는 것과 기다림 때문이다. 순간을 포착하려고 얼마나 오래 숨을 참은 걸까, 작품 속에 기다림이 확연하므로. 지난한 기다림을 알기에 보는 이도 가만한 응시로 마음을 포갠다. 불현듯 애틋한 서정이 차오른다. 오래 기다리면 그가 오는 걸까, 좋은 날이 오는 걸까.(183쪽)
이 책을 읽다 보면 내 마음에도 어느새 그림 한 점이 담길 것이다. 지난날의 추억일 수도 있고, 지금을 열심히 달리는 나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내 마음이 가득 담긴 짧은 글을 한 편 써보고 싶어질 수도 있겠다. 책장을 덮는 순간, 미술관으로 향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책의 역할은 다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