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의 숨은 장면, 시(詩)가 되다
이 시집에서 인상적인 작품으로는 「핏빛 대지의 진실」이 있다. 이 시는 KBS 〈태조 왕건〉 촬영 중 실제 배우가 불화살에 부상을 입었던 장면을 소재로 삼았다. 임병기는 이 극적인 순간을 단지 사건으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와 연기의 경계를 넘나들며 생사의 현장을 시로 옮긴다. “화살을 움켜쥔 손에서 떨리는 힘줄이 살아 있음을 증명했다”는 구절은 배우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결의를 동시에 담아내며, 연기가 곧 실존의 기록임을 보여준다. 배우의 연기를 넘어 삶 자체가 투영된 이 시는 「천년의 그리움」이 지닌 예술적 성취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대표작이다. 또한 「사이렌의 울림」은 배우로서 맞닥뜨린 일상의 단면을 매우 시적인 언어로 그려낸 작품이다. 무대나 촬영장이 아닌, 일상에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에 겹친 생의 불안과 반성과 고요한 기도를 시는 담담하게 그려낸다. “누군가를 실어 간 그 구급차의 불빛이 어쩐지 내 삶을 비추는 것 같았다”는 구절은 배우의 고백이자 인간으로서의 회한이다. 카메라 밖에서의 삶, 그리고 배우라는 존재가 짊어진 일상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시이다. 「동료 안형식의 죽음을 애도하며」는 사극 촬영장에서 함께한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로, 배우의 직업적 동지애와 인생의 무상함을 깊은 울림으로 전한다. 극 중 검을 나란히 들었던 전우는 이제 현실 속에서 이별의 존재가 되었고, 남은 자의 슬픔은 무대 위의 연기가 아닌 실존의 울음으로 번져간다. 이 시를 통해 독자는 단순한 추모를 넘어, 공동의 시간을 공유했던 존재의 깊이를 체감하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대 밖 역시 훌륭하게 살아냈다
사극 드라마의 부활을 진심으로 고대하는 마음이 담긴 작가의 기고문에서 그는 “대하드라마는, 특히 대하사극은 사각형 화면 안에서 극적으로 재탄생하는 역사다.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시공간을 뚫고 나와 살아 움직이며 오늘의 나에게 말을 거는 유기체다. 오래전 내 조상의 삶을, 그리움과 감동의 그 순간을 눈앞에서 보여 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털어놓은 “이런 귀한 경험을 제공하는 대하드라마를 전통으로 만들어 가고 싶은 것은 우리 몇몇 배우나 연출가들만의 욕심은 아닐 것이다. 점점 점점 사라지는 우리의 대하사극, 어떤 방법으로든 이 드라마 제작의 전통이 이어졌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곡진한 바람 앞에서는 사뭇 숙연해진다. “수천 밤의 별빛 아래에서 역사 속을 헤집고 다닌 스태프, 배우 여러분의 열정에 감사한다”는 작가 임병기의 감사 인사처럼 이 시집은 세월과 함께 쌓인 사랑, 애환, 기억의 무늬를 담은 시간의 저장고이자 정통 사극의 시대정신을 품은 문학적 연대기라 할 수 있다. 연출가 김종선은 “촬영이 끝난 뒤에도 꺼지지 않는 열정의 기록”이라 평하며 “이 시집은 대한민국 정통 사극의 한 시대를 증언하는 귀한 기록”이라 강조했다. 배우이자 목회자인 임동진은 “단지 사극의 기록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 고백이며 세상 모든 연기하는 존재들에게 바치는 깊은 위로이자 응원”이라고 밝혔다. 배우 최수종 또한 “대본이 아닌 심장으로 써 내려간 연기의 순간들”이라며 깊은 감동을 전했다. 50여 년을 한결같이 배우로 살아온 이가 아우른 연기의 경험과 생의 감동을, 그의 시가 전하는 삶과 예술의 가장 뜨거운 교차점을, 시가 된 역사와 인간의 이야기를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