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마지막 유작
2023년〈뉴요커〉선정 올해의 책
1. 계몽주의는 서구에서 탄생하지 않았다
- 바다의 무법자 해적들과 검은 피부 여성들이 함께 만든 원형적-계몽주의
서구 근대의 위대한 출발점으로 찬미하며 ‘계몽주의’를 떠올리자마자, 몽테스키외와 볼테르 그리고 백과전서파의 디드로 같은 ‘서구’의 백인 남성 사상가들이 저절로 연상될 것이다. 계몽주의를, 과학적 인종주의와 근대적 제국주의, 집단학살의 기초가 되었다고 보는 급진적 사상가마저 이러한 서구 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이 책 『해적 계몽주의』의 저자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계몽주의를 옹호하든 비판하든 그간 이어져 온 논쟁들은 오히려 우리를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진짜 던져야 할 질문은 바로 “계몽주의 이상들, 특히 인간 해방에 대한 계몽주의 이상들이 과연 의미 있는 방식으로 ‘서구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그레이버에 따르면, 우리는 ‘백인’의 완곡한 표현에 불과한 ‘서구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인종적 오만함에 대한 비난을 구실로 ‘백인’으로 분류되지 않은 모든 이들이 역사, 특히 지적인 역사에 미친 영향을 배제해왔다. 그 대신 역사, 특히 급진적 역사가 일종의 도덕 게임이 되어버렸는데, 이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의 위인들이 저질렀던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배외주의를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루소를 비판하는 사백 쪽의 책이 여전히 루소에 관한 사백 쪽의 책이라는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루소를 비판하는 그 행위 자체도 여전히 루소라는 서구의 백인 지식인만을 부각시킬 뿐, 비서구의 지적 영향과 성취를 배제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도 말이다.
계몽주의 사상이 활짝 개화한 곳들이 파리, 에든버러, 쾨니히스베르크, 필라델피아와 같은 도시들에서였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서구의 몇몇 지식인이 만든 게 아니라, 전 세계를 종횡무진했던 대화와 논쟁, 사회적 실험들의 산물이었다. 대서양, 태평양, 인도양의 해양세계들은 이 모든 과정에서 특별한 역할을 했는데, 가장 활발한 대화가 이루어졌을 곳이 바로 배 위와 항구 도시들이었기 때문이다. 유럽 계몽주의 시대는 무엇보다 지적 종합의 시대였다. 과거에는 지적으로 후미진 곳이었던 영국과 프랑스가 급작스레 세계 제국의 중심이 되어 그들로서는 깜짝 놀랄 만큼 새로운 사상들, 예를 들어 아메리카에서 온 개인주의와 자유의 이상들, 중국에서 영감을 받은 관료제 국민 국가라는 새로운 개념, 아프리카의 계약 이론들, 그리고 중세 이슬람에서 독창적으로 발전된 경제 및 사회 이론들을 접하게 되면서, 이들을 통합하려 했던 것이다.
이 책『해적 계몽주의』는 그간 은폐되고 무시되어왔던 계몽주의의 비서구적 기원들, 그레이버가 ‘원형적-계몽주의’라고 이름 붙인 것 중 하나로, 해적들과 마다가스카르 선주민들에 주목한다.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수천 명의 해적이 마다가스카르 북동부 연안을 자신들의 거처로 삼았고, 여기서 최초의 계몽주의 실험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해적들의 민주적인 통치 방식과 마다가스카르 정치 문화의 평등주의적인 요소들을 창조적으로 종합한 것이었다. 바다의 무법자 해적들과 검은 피부의 여성들이 함께 만들어간 가장 급진적인 정치 실험의 현장으로 가 보자. 어쩌면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릴 뻔한 그 이야기 속으로.
2. 마다가스카르 여성들, 해적과 동맹을 맺고 자유를 쟁취하다
- 비서구 여성을 남성들의 권력 게임의 장기말로 취급해 온 서구 인류학에 대한 전복
서구 인류학에서 비서구 선주민 여성들은 각 부족 간의 결속과 유대에 쓰이는 재화나 축적 가능한 부(富) 정도로만 등장해왔다. 마다가스카르 선주민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럽인들의 기록에서 그녀들은 남성들이 다른 남성들에게 제공하는 성적인 ‘선물’로 묘사되어왔다. 여성들은 납치되고, 되찾아지고, 지배 혈통에 부속되었지만, 그들 자신이 독자적인 행위자로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해적 계몽주의』는 서구 인류학이 비서구 여성들에게 덮어 씌었던 통속적인 표준 서사를 전복시킨다. 해적들과의 만남을 주도적으로 개시한 것은 마다가스카르 여성들이었다. 말라타, 즉 해적과 마다가스카르 여성 사이의 혼혈은 외국인 해적들이 해안에 정착해 현지 아내를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마다가스카르 여성들이 결혼하기 위해 외부 남성들을 찾아 나섰기 때문에 생겨났던 것이다. 실제로 여성들은 남성들을 얻기 위해 강력한 파나포디(fanafody), 즉 약물을 사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마다가스카르 여성들의 주된 동기는 로맨틱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사랑에 시름한 것이 아니라 남편이 없는 여성이 ‘아무런 대우도 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존중받을 수 있는 방법과 상업에 참여할 수 있는 수단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 이들이었다. 그들이 매일 해변에 내려가 선원들을 찾았던 것은 우선, 이국적 외부인들, 특히 유럽이나 아라비아처럼 머나먼 땅에서 온 외부인들이 높은 지위를 가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선원들, 특히 해적들이 막대한 양의 교역 가능한 상품들을 가져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여성들은 단순히 남성들이 벌이는 게임의 장기말이 아니라, 자기 권리를 가진 사회적 행위자가 되기 위한 수단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여성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한 상인들이기도 했다. 당시 마다가스카르의 베치미사라카 영토의 해안 도시들은 ‘여성들의 도시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 도시들에는 울타리로 둘러싸인 공간 안에 대략 20~50채 정도 되는 ‘큰 집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커다란 집에는 바딤바자하(‘외국인들의 아내들’)와 자주 부재중인 그들의 남편들, 그리고 여러 친족과 하인들이 살았다. 이 여성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 공동체의 중추를 이루었고 어떤 중요한 결정도 그녀들을 빼놓고 내려질 수 없었다. 해적들은 진취적인 마다가스카르 아내들에게서 자신들이 가진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았다. 불법적으로 획득한 막대한 부를 안전하고 편안한 생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처분하는 것을 둘러싼 문제 말이다. 단지 부에 대한 처분권을 야심 찬 여성 상인들에게 넘기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해적들은 다른 외국인들과 달리 아내의 결정을 간섭할 어머니나 다른 가족 구성원과 함께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이곳과 관련된 아무런 사회적 지식도 없었으며 대개는 주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할 능력조차 없다. 이런 상황은 여성 파트너들을 단순한 중개자가 아닌 그들의 멘토로 만들어 주었다. 이 또한 그녀들에게는 지역 사회를 효과적으로 재창조할 기회가 되었다. 항구 도시의 건설, 성적 관습의 변혁, 결국은 해적과 낳은 아이들을 새로운 귀족으로 신분 상승시키는 것, 이런 것들이 마다가스카르 여성들이 해낼 수 있었던 일이다.
3. 해적선에서 시작된 민주주의, 육지에서 새롭게 되살아나다
- 지배자 없이 모두가 평등한 관계 그리고 우아한 수사와 대화의 즐거움
흉포한 이미지와는 달리 실상 해적들은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 통치의 발전을 선도했다. 해적단은 온갖 종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매우 다양한 종류의 사회적 배치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를테면 한 배에 영국인, 스웨덴인, 도망친 아프리카 노예, 카리브해의 크레올인, 아메리카 선주민, 아랍인 등이 함께 있었다. 이들은 임시변통적 평등주의에 헌신했으며 새로운 제도적 구조를 신속하게 창출해야 하는 상황에 함께 던져졌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완벽한 상황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학자들 중 일부는 북대서양 세계에서 계몽주의 정치가들이 이후에 발전시킨 민주주의 형태의 일부가 1680년대에서 1690년대 사이 해적선에서 먼저 시도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해적 선장들은 흔히 외부인들에게는 무시무시하고 권위적인 악당으로서의 명성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자신들의 배 위에서는 다수결로 선출되었을 뿐 아니라 마찬가지 방식으로 언제든 해임될 수 있었다. 그들은 적들의 추격이나 전투 중에만 명령을 내릴 권한을 가졌고, 그 외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평등하게 회합에 참여해야 했다. 선장과 항해장(항해장은 회합의 사회를 보았다)을 제외하면 해적선에는 아무런 서열도 없었고, 그 권력 또한 부분적이고, 일시적이고 쉽게 철회될 수 있었다.
마다가스카르에 정착한 해적들이 열심이었던 것은 배 위에서 처음 발전시킨 민주주의적 제도들을 육지에서도 실행 가능한 형태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그들과 함께 어울리고 소통했던 마다가스카르 선주민들도 해적들이 만들어낸 본보기에 실제로 영향을 받았다. 이를테면 당시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직접적인 전쟁의 수행을 빼고는 공동체의 문제들에 대한 결정은 카바리(kabary)라고 불리는 회합에서 정교한 합의 도출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주로 마을, 씨족 단위로 또는 외국의 침략 가능성이나 해안가에서 유럽 선박이 목격된 경우처럼 더 중대한 사안은 지역 단위로 이루어졌다. 숙의 과정(deliberations)은 며칠이 걸릴 수도 있었다. 때로는 회합을 위한 임시 오두막이 지어지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일하고, 놀고, 쉬고, 서로 이야기 나누는 데 대부분 시간을 보내왔지만, 마다가스카르에서는 특히 대화의 기술이 매우 높이 평가되었다. 어느 역사 자료에는 “소문을 좋아하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이 흥미로운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카바리의 소재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했다.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실제로 토론과 논쟁, 재치, 이야기하기, 우아한 수사의 즐거움은 그들의 문화에서 누구에게나 매력적으로 여겨지는 것이며, 그렇게 여길만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해적 계몽주의』에서 그레이버가 주장했듯이, 해적선들, 암보나볼라 같은 해적 마을, 해적들과 긴밀히 협력한 마다가스카르 선주민들이 설립한 베치미사라카 연합은 여러 측면에서 급진적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의식적인 시도들이었다. 그들은 이후 정치철학자들에 의해 발전되고 한 세기 후 혁명 정권들에 의해 실행될 관념들과 원칙들을 탐색했던 것이다. 바다 위의 해적선과 땅 위의 베치미사라카 연합 둘 다 고집스럽게 평등주의를 추구하며 어떤 지배자의 권위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리바이어던의 빈자리는 우아한 수사와 대화의 즐거움이 채워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