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벗어 놓고 간 저 찬란한 한 벌의 옷
유성호(문학평론가·한양대학교 인문대학장)
상상적 모험과 서정적 품격
동시영(董時泳)의 시선집 「기억의 형용사」는 개성적 상상력과 선명한 자의식이 빛을 뿌리는 심미적 언어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열 권의 시집은 열 권의 생각”(「시인의 말」)이라고 말함으로써 이번 시선집이 그동안 출간한 열 권의 시집에서 가려 뽑은 정선(精選)의 결실임을 토로하였다. 등단 20년을 훌쩍 넘긴 시인이 펴내는 이번 시선집에서 우리는 시대를 품고 넘어서는 시인의 활달한 상상적 모험과 타자를 포괄하려는 흔치 않은 서정적 품격을 만나보게 된다. 그만큼 시인은 자신의 기억 속에서 가장 반짝이는 순간들을 우리에게 데려와 그것을 공공적 기억으로 확산해가는 작법을 일관되게 취해간다.
우리가 잘 알듯이, 서정시는 시인 자신이 스스로를 탐구하고 돌아보는 자기 인식 속성의 장르이다. 그래서 그 창작 동기에는 나르시시즘이라는 자기 확인 욕망이 잠재적으로 드리워져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동시영의 시는 이러한 자기 몰입의 에너지를 여러 차원에서 벗어난다. 가령 그의 시세계가 단순한 자기도취의 나르시스적 몽환에 그쳤다면, 우리는 한 자연인의 내면은 관찰할 수 있었겠지만 거기서 완결된 타자 지향의 미학을 발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철저하게 자아의 경험으로부터 시상(詩想)을 길어오지만 그것이 타자들과 소통하려는 열망을 내포하게 함으로써 관계론적 신생과 확장의 가능성을 열어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동시영의 시를 통해 자아와 세계가 경험적 언어 속에서 접점을 이루며 상호 소통하는 탄성(彈性)의 미학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그 세계 안으로 성큼 들어가 보도록 하자.
압축과 여백의 미(美)를 통해 회복하는 서정의 본령
동시영 시인은 세계내적 존재로서 인간의 복합적 삶을 장광설로 언어화하지 않고 일종의 생략 과정을 통해 독자의 상상적 참여를 강화한 작품을 이번 시선집에 여럿 실었다. 이렇게 사유와 감각을 축약하면서 비본질적 언어를 배제하는 그의 시는 초월과 암시를 주음(主音)으로 하는 미학을 빛나게 구현한 결실들이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의미 과잉을 경계하려는 이러한 작법은 잃어버린 서정적 윤기와 총기를 되부르는 강력한 방법으로 원용되고 있다. 그 가운데 몇 편을 만나보도록 하자.
가끔씩
신들이 지상으로 걸어 주는 전화
- 「시는」 전문
절만 절이 아니다
마음 절절한 곳
그곳이 절이다
- 「절」 전문
촌철살인의 축약성을 핵심으로 하는 단시(短詩)들은 번다한 언어를 배제하면서 순간적인 공감을 불러온다. 가령 ‘시(詩)’가 “가끔씩/신들이 지상으로 걸어 주는 전화”라고 할 때 ‘시인’은 그 전화를 받고 지상에서 그 언어를 받아쓰는 이가 되어간다. 신성하고 아름다운 천상의 전화가 ‘시’를 거룩한 언어 행위로 규율해준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절’이라는 소재를 향해서 시인은 “절만 절이 아니다/마음 절절한 곳/그곳이 절이다”라고 쓴다. 사찰이라는 일차적이고 평면적인 의미를 넘어 ‘절’은 절절한 마음이 울리는 모든 곳으로 한없이 확장되어간다. 이러한 울림의 확장 과정이 결국 단시의 효과를 극대화한 성과가 아닐까 한다. 다음은 어떠한가.
날마다 하늘을 여는 열쇠
키로 문을 연다
- 「나무」 전문
나무는 거꾸로 선 빗자루
오늘도
하루종일
허공을 쓸고 있다
- 「빗자루 명상」 전문
발을 따라간
발자국은 없다
무한으로 가는
삶을 따라간
사람도 없다
- 「발자국」 전문
앞의 두 작품 모두 ‘나무’를 불러왔다. 나무는 “날마다 하늘을 여는 열쇠”여서 문을 열 수 있고 “거꾸로 선 빗자루”여서 하루종일 허공을 쓸 수 있다. 이러한 짧은 언어의 명상이 ‘나무’를 신성하고 친숙한 존재자로 만들어준다. 뒤의 시편은 일종의 잠언적 성취를 이룬 작품인데, 가령 “발을 따라간/발자국은 없다”면서 발은 떠나고 지상에는 발자국만 남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마침내 시인은 “무한으로 가는/삶”을 따라갔던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강조하면서, 우리도 발자국을 남긴 채 떠나야 하는 유한자(有限者)임을 고백한다. 이러한 경구(警句) 지향의 짧은 언어는 “은하수는 별들의 산책로”(「은하수」)라든가 “시계는 시간의 물레방아”(「시계」) 같은 참신한 비유적 명명에서도 그 흔적을 이어가고 있다 할 것이다.
동시영 시인은 언어 과잉을 경계하고 배제하려는 선택 행위를 통해 이성적 경계를 지우면서 나머지는 여백으로 돌리는 시적 방법론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압축과 여백의 미를 통해 서정의 본령을 회복해가는 동시영 시편의 밀도가 새삼 깊게 다가오고 있다.
‘오늘’이라는 현재형에 듣는 ‘한마디 말’
두루 알다시피 서정시는 시인이 스스로 살아온 삶의 내력을 회상하고 성찰하는 시간예술이다. 앞에서도 강조하였듯이, 고백과 기억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서정시의 원리는 자신의 내면으로 몰입하려는 힘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다양한 타자들로 번져가려는 충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엿한 시간예술로서의 서정시는 이러한 고백과 기억을 통해 시인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섬세하게 재구성함으로써 그 안에 녹아 있는 보편적 삶의 이법을 탐색해가는 과정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동시영의 경우, 지나온 시간에 대한 초월적 미화(美化)보다는 자신의 삶을 가능케 해준 현재형의 흔적을 추스르는 쪽에서 그러한 발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다음 시편을 한번 읽어보도록 하자.
어제는 나를 따라왔을까
풀처럼 뽑혔을까
시간의 자식으로 커 오르는 내일
꽃 입고 걸어온다
저 봄은 몇 살일까?
봄처럼 생각은 늙지 않고 자란다
기억의 형용사
계속의 몸
입도 생각도 모른다
하루를 찾으면
하루를 잃는
갈등을 먹여 살리는, 마음 하나 지나간다
시간이 뿌리친다, 씨의 집, 공간 숨터
종로를 걸어가며
종로 닮는 사람들
오늘을 힘껏 짜,
시간 즙을 마신다
- 「기억의 형용사 - 씨의 집」 전문
시선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이 시편은 그동안 살아온 시간을 기억하고 오늘의 시간을 다짐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시인 자신을 따라온 ‘어제’가 풀처럼 뽑히고, 시간의 자식으로 커가는 ‘내일’이 꽃을 입은 채 찾아온다. 그렇게 찾아온 봄처럼, 시인의 생각은 늙지 않고 힘있게 자라갈 뿐이다. 시인이 지향해온 시쓰기는 그렇게 “기억의 형용사”에 의탁하여 역동적으로 펼쳐져온 것이다. 하루를 찾으면 하루가 사라지는 흐름 속에서 시인은 “씨의 집, 공간 숨터”로서의 시간의 처소를 만들어간다. ‘오늘’을 떠올리면서 시간 즙을 한껏 자서 마시고자 하는 것이다. 어제-오늘-내일의 선조적 흐름이 아니라 ‘오늘’을 중심에 두고 어제와 오늘을 끌어당기는 그 “기억의 형용사”가 바로 ‘시인 동시영’의 모습을 아련하게 전해준다. 이러한 적공(積功)의 과정은 그 자체로 자신을 가능케 해준 가장 종요로운 내질(內質)이 시간이었음을 고백하는 시인의 모습을 암시해준다. 모든 순간순간이 오늘이라는 현재형에 붙박여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라지는 순간을 잡기 위해 사랑”(「사랑하고 흐르고」)하고 그 “순간만 새 것이고 모든 것은 헌 것”(「광장에서 들린 말 - 제마 알프나 광장」)임을 증언해가는 것이다. 아름답고 애잔한 문양(文樣)이 그 안에 가득 흐르고 있지 않은가.
-중략-
또 다른 시쓰기를 향해 나아갈 아름다운 언어와 사유
지금까지 우리가 천천히 읽어온 것처럼, 동시영의 시선집 「기억의 형용사」는 그동안 펴낸 열 권의 시집이 집성(集成)된 미학적 결실이다. 그는 이제 삶의 연륜에서 빚어지는 오랜 감동과 깨달음의 세계를 노래함으로써, 그 안에 나날의 삶에 대한 발견의 순간을 녹이고, 인간과 세계를 원초적으로 이어주는 고리로서의 언어를 열망해간다. 그래서 그의 시는 우리에게 이성적 사유를 위한 계기를 제공하기도 하고, 실천적 삶에 대한 자극을 주기도 하며, 시인 자신의 순수 원형을 상상케 함으로써 어떤 삶의 표지(標識)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가 수행해가는 이러한 시쓰기의 도정은 삶의 순간순간을 지탱해온 운동의 결과로서, 시인 스스로의 실존적 조건을 힘겹고도 아름답게 유지해가는 원리로 각인되어간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시를 통해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지남(指南)을 탐색해갈 수 있었으리라.
결국 동시영의 시는 서정의 원리에 대한 섬세한 감각, 삶의 근원과 구체성에 착목한 의미 있는 성취로 우리 문학사에 남을 것이다. 그는 우리 시대의 불모성에 대한 유력한 항체를 쉼 없이 만들어냄으로써 자신만의 고전적 사유와 감각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신이 오랜 시간 바쳐온 등불 같은 사유와 감각을 통해 자신의 시편들을 더욱 밝혀갈 것이다. 또한 그의 기억을 만들어준 소재 역시 그 스스로 만나온 사람과 사물이었으니, 앞으로도 이러한 것들이 동시영 시의 확고한 바탕이자 궁극이 되어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존재론적 기원을 환기하는 시공간에서 생의 근거(ground)를 구성하면서 또 다른 시쓰기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 ‘또 다른 시쓰기’의 모습은 그 특유의 실존적 성찰과 함께 다양한 형식과 기법, 구조적 완결성을 구축해가는 ‘동시영 브랜드’의 과정으로 하염없이 이어져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랫동안 이어져온 ‘시인 동시영’의 이러한 아름다운 언어와 사유가 우리 시단을 출렁이게 하는 것을, 매혹의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