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세상(가정, 학교, 사회, 국가, 지구촌 등)이 전하는 가치에 세뇌되어 살아간다. 그중에 종교 가르침도 있다. 종교 가르침이 사회 구성원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는 이슬람 사회나 힌두교 사회에서 엿볼 수 있다. 이것은 가장 많은 신도를 보유하고 있고 인류 사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다. 종교는 개인의 사고 틀을 만들고 개인은 그 틀 속에 구속되어 사유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인생의 행로가 결정된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에는 원죄설과 구원론 그리고 부활이 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부활하였다고 주장한다. 예수의 부활은 기독교의 생명이다. 부활 없는 기독교는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그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부활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영생을 얻으려면 죄로부터 구원받아야 하는데 오직 예수에게 의존해야 한다고 한다. 당연히 기독인들은 이런 교리에 따라 생각하고 살아간다.
그런데 만약 이런 교리가 예수의 생각이 아니라 로마 교부나 바울의 생각이었다면 어떻게 되는가? 원래의 가르침과 너무도 달라진 예수의 가르침이 진리로 받아들여져서 많은 사람의 삶과 의식을 지배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무섭지 않은가?
왜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걸까? 기독교 교리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일까? 고통스러운 세상이지만 인구는 계속 늘고 있고,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신은 인간이 태어날 때마다 매번 영혼을 창조하여 육체에 배분한다. 어떤 혼은 부자나 선진국에, 어떤 인간은 빈곤하게 혹은 가난한 나라에 태어난다. 여기서부터 신의 정의가 의심된다.
무엇보다 아담의 죄를 새로 만들어진 영혼이 이어받게 된다는 주장은 신의 능력이나 의도를 의심하게 한다. 신의 능력으로 원죄(?) 없이 깨끗하게 혼을 창조하지 못한다는 것인가? 도대체 고통스럽고 혼란한 세상에 불완전한 영혼을 계속 만들어 배치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신은 컴퓨터 게임처럼 세상과 인간을 만들어 게임을 즐기는 건가? 이처럼 예수가 아닌 교부들이 만들어낸 기독교 교리의 문제점은 한두 개가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하느님 아들이란 이유로 그분이 남긴 어록만이 아니라 제자들이 남긴 신앙고백 문서를 문자 그대로 믿는다. 생전에 예수를 만난 적이 없었던 바울이라는 사람의 편지글이 정경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런 현실을 우리는 냉철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바울이 편지글에서 주장한 이신칭의(오직 믿음으로 신이 의롭다함을 우리가 얻음, 즉 믿음만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 논리가 기독교의 기본교리(원죄론, 구속론, 예수 신성론)를 형성하고 이 교리가 기독교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이런 교리가 예수의 어록이 담겨있는 4복음서에 나오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물론 성경이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경전인가 하는 것도 확인이 필요하다.
성경의 진위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어 왔고, 성서학자들은 성경 왜곡(내용 변경, 첨부, 삭제 등)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수는 성경에서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예수는 4복음서에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교회 교리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예수는 직접적으로 원죄론도, 동정녀 성모 마리아론도, 보혈을 통한 구원론도, 연옥도, 삼위일체도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후대에 교부들이 주장한 내용이고 이런 내용의 상당 부분은 바울의 사상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예수의 종교가 아니라 바울의 종교란 말을 하는 학자도 상당이 있다.
4복음서 저자들은 전승 자료를 가지고 자신의 시각으로 새로운 예수를 만들어냈다. 더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끌어들이려는 저자들의 시도였다. 그들은 극의 시작인 초반부에 예수 가계도를 화려하게 꾸미고 세례요한을 통하여 예수가 예정된 메시아임을 밝히려고 하였다. 예수의 구체적 행적이 나타나는 시기부터 공관 복음서는 공동 전승 자료를 각자의 취향에 따라 순서를 배정하고 내용이나 단어에 변화를 주었으며 그 결과 각자의 독특한 복음서가 나왔다. 구약의 예언 성취를 바란 마태복음서는 좋은 예이다. 예수 행적과 언행이 담긴 자료는 단편적이고 지금 복음서에 전해지는 예수 자료에 얼마만큼의 진실이 담겨있는지 알 수가 없다.
실제로 4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어록은 극히 적은 분량이고 그것도 일반 대중을 위한 수준 낮은 비유적 설명이 대부분이다. 이런 한계를 지닌 복음서지만 그래도 정경 중에서는 4복음서가 예수의 진짜 말씀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임에는 틀림이 없다. 사실 지금 정경으로 인정받고 있는 신약은 여러 종파 간의 싸움에서 승리한 로마 가톨릭의 주장만 담고 있을 뿐이다. 그 결과로 예수의 비밀 가르침으로 알려진 영지주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파괴되어 사라졌다.
이 책 본문에서 성경해석을 하면서 영지주의 복음서 구절을 많이 인용하는데, 이는 영지주의 복음서에 예수의 가르침이 많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예수 사후에 존재했던 많은 종파의 가르침은 로마 황제의 기독교 공인과 지금의 기독교 교리를 만든 교부들에 의하여 제거되어 사라졌고 영지주의 가르침이 그러했다.
그러면 영지 가르침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것이다. 주요 종교는 어김없이 수준 낮은 일반 대중을 위한 현교와 수준 높은 소수의 사람을 위한 비밀가르침(밀교)으로 나뉘어 존재해 왔다. 불교의 밀교는 티베트 밀교이고, 유대교의 밀교는 카발라이고, 이슬람의 밀교는 수피즘이고, 기독교의 밀교는 영지주의이다. 그리고 이 영지주의가 바로 예수가 소수의 제자에게 전한 비밀 가르침이다.
예수 비밀 가르침인 영지주의에서는 구원은 율법 엄수나 믿음이 아니라 영지(앎)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영지주의가 기독교의 주류가 되었다면 지금 우리가 만나는 대속론이나 원죄론, 천국론 등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4복음서에는 영지주의 내용이 비유와 상징으로 어느 정도 남아있다.
이 책은 영지주의적 성경해석을 통하여 초대교회나 신학자에 의하여 왜곡되지 않은 예수의 원래 모습과 가르침을 알리려는 것이며, 또한 오랜 세월 인류 의식을 옥죄어 온 교회 교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함이다.
이 책은 또한 구약의 주요 구절을 카발라 시각으로 해석한다. 구약에는 역사적인 사실도 담겨있지만, 구약의 많은 부분이 신화이고 상징임이 연구를 통하여 드러나고 있다. 구약을 신의 말씀으로 생각하여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너무도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카발라는 영지주의 가르침의 근원이며 모든 종교철학의 모태로 알려진 철학이다.
예수가 그랬듯이 진리는 시공간에 따라 그리고 사람들의 의식 수준에 따라 다르게 설해졌다.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사실도 무시하고 의식 수준이 낮았던 시대에 방편으로 설해진 가르침을 아직도 금과옥조처럼 따르는 종교단체도 있고, 심지어 지금과는 너무도 달랐던 시절에 설해진 도덕규범이나 지침을 신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따르는 종교단체도 있다. 이들 종교단체는 시공간에 따라 변하는 지침과 영원불변하는 진리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유대 성자 힐렐(BC 1세기)은 “네가 싫은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라는 황금률이 토라의 기본 정신이라고 말하였고 유대 성자 아키바(AD 2세기)는 율법을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라는 말로 요약하였다. 이런 기본 정신만 지켜진다면 세상은 참으로 평화로울 것이다. 간디는 이런 말씀을 하였다. “나는 예수를 사랑하나 크리스천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시각으로 성경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온다. 기존 정통 교리를 배재하고 선입견 없이 성경을 바라보면 전혀 다른 모습의 가르침이 나타난다. 영지주의에 따르면 예수는 붓다처럼 무지와 고통 속에 헤매는 인류에게 영지 지혜를 전하여 인류가 원래의 잃어버린 자리를 다시 찾도록 이 세상에 오셨다. 그것은 누구를 믿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통하여 각자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목마른 사람을 물가로 인도는 하지만 물은 목마른 사람이 마셔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책은 우주의 진리를 담고 있는 카발라와 영지주의 사상에 근거한 성경해석이며, 수천 년간 인간의 의식을 구속하여 온 기독교 교리에 대한 이성적 비판이다.
달라이 라마의 저서 "관용(2010년, Transforming the Mind, p70)"에 이성과 관련된 이런 글이 나온다.
불교에서 비판적 사유 과정은 경전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됩니다. 붓다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치 사람들이 금의 순도를 판단하기 위하여
그것을 용광로 속에 넣어 녹여 보거나
또는 그것을 잘라서 시금석 위에 놓고 검사하는 것처럼
비구들이여, 여러분은 나의 말을 나에 대한 존경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에 받아들여야 한다.” -붓다-
지금의 유일신교에는 이성이 결여가 되어 있다. 불행하게도 이성 없는 종교 교리가 세상을 지배한다. 이 책이 성경을 이성이 아닌 믿음으로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들의 사고 틀을 바꾸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