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처럼 아름다운 소년 ‘신주로’가 그려내는 핏빛 지옥도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시나 고스케는 동료 오쓰코쓰와 함께 신슈 N 호반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기로 하고, 조카딸과 단둘이 사는 우도라는 의사의 저택에 방을 빌린다. 그런데 N 호반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의문의 노파가 다가와 “그곳에 가면 피의 비가 내리고 N 호수가 새빨갛게 물들 것”이라는 섬뜩한 예언을 남긴 채 사라진다. 우도의 저택에 도착해 휴가를 즐기던 두 사람은 문득 우도와 조카딸 유미 외에 다른 이의 기척을 느끼고, 얼마 후 버드나무 아래에서 물에 젖은 신비로운 미소년을 보게 된다. 한데 그 얘기를 전해 들은 우도는 웬일인지 심하게 동요한다. 그리고 인근의 아사마 화산이 분화하던 날, 호숫가에 나갔다가 돌아온 시나와 오쓰코쓰는 ‘신주로’라는 이름의 그 미소년이 우도를 습격해 목을 베어내는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다. 잘린 머리를 물속에 던져버리고 유유히 사라진 신주로. 경찰이 수사에 나서지만 사라진 우도의 머리도, 신주로의 행방도 찾지 못한 채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데…….
탐미적 분위기와 수수께끼 풀이의 절묘한 조화
‘긴다이치 고스케’와 비슷한 듯 다른 매력의 초기 걸작
1936년 10월부터 1937년 2월까지 추리소설 전문지 《신청년》에 연재되었던 《신주로》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작가 인생에서 하나의 변곡점이 되어준 작품이다. 1933년, 전업 작가로 전향한 후 집필에 박차를 가하던 그는 큰 위기를 맞는다. 〈사혼자死婚者〉라는 소설을 잡지에 싣기로 하고 구상하던 중 각혈을 하여 나가노현의 요양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게다가 란포를 비롯한 동료 작가들의 후원을 받으며 1년여의 공백 끝에 간신히 내놓은 소설 〈도깨비불〉이 당국의 검열에 난도질당하는 비운까지 겪었다. 당시 요코미조 세이시는 일본 대중소설의 흐름에 따라 탐미적이고 음울한 작품들을 주로 썼는데, 이러한 경향은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극에 달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전부터 고민해온 추리소설 작가로서의 방향성을 확립하고 새로이 집필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게 되는데, 이러한 과도기적 특성은 〈사혼자〉의 구상을 발전시켜 완성한 《신주로》와 ‘유리 린타로’ 시리즈에 고스란히 담겼다. 덕분에 《신주로》에서는 아름다운 호반과 미소년을 둘러싼 특유의 탐미적 분위기와 논리적 추리의 융합이 본격적으로 시도되었고, 요코미조 세이시는 이런 작풍을 더욱 발전시켜 종전 후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를 탄생시키며 일본 본격 추리소설의 새 장을 열기에 이른다.
물론, 긴다이치 고스케 데뷔작인 《혼진 살인 사건》보다 10년이나 앞선 작품이고, 본격 추리소설로의 노선 전환이 이루어지기 전 과도기적 작품이므로 트릭과 동기의 치밀성은 다소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 린타로 시리즈는 고풍스러운 문체와 탐미적 분위기, 관능성 등을 보여주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초기 작풍을 담고 있고 《신주로》는 이런 특성을 한껏 살린 걸작이다. 비록 명성에 밀려 ‘긴다이치’ 시리즈에 편입되긴 했으나 1978년과 1983년, 2005년에 세 차례나 영상화되었으며, 에도가와 란포는 이 작품을 자신이 최고의 미스터리로 꼽은 이든 필포츠의 대표작 《붉은 머리 가문의 비극The Red Redmaynes》과 비교하기도 했다. 긴다이치 고스케와 비슷한 듯 다른 매력을 가진 새로운 명탐정 ‘유리 린타로’, 그리고 ‘진주’라는 이름에 걸맞게 더없이 아름답지만, 시골과 도시를 종횡무진하며 피의 지옥도를 그리는 수수께끼의 소년 살인귀 신주로. 특유의 탐미적 분위기와 수수께끼 풀이가 가장 절묘하게 어우러져 요코미조 팬들 사이에서도 꼭 읽어보고 싶은 작품으로 자주 언급되는 《신주로》로 조금 덜 치밀하지만 한층 섬세하고 아름다운 ‘긴다이치 고스케’ 이전 시대를 한껏 음미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