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늦봄. 우리 시대에 시란 무엇인가. 여전히 정치권은 혼란의 극에 달해있고 사회엔 공정과 상식은 낡은 저잣거리의 불량식품이 되어버린 듯 부조리가 만연하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퇴색했다가 전 국민의 노력으로 겨우 회복했다가, 를 반복 중이다. 한국의 시단은 오랜 출판 불황으로 스타작가에 의존하고 있다. 독자들에게 철저히 맞는 대중 시인들이냐, 유수한 등단 절차를 마친 젊은 시인이냐, 를 두고 나눠진 모양새다. 이에 따라 전반적으로 예술장르의 첨탑꼭대기에 올라앉아있는 시의 높이와 깊이는 낮아지고 얕아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풍경에도 요란하게 담장 너머 화려한 꽃밭에 달려가기 보다는 쓸쓸한 풍경에서 제자리를 지키며 어떤 운명처럼 부단하게 시작을 이어가는 일군의 시인들이 있다.
유연 시인도 제자리에서 제자리를 지키며 부단히 시를 써온 시인이다. 창원에 사는 일흔 넷 유연 시인의 첫 시집 〈집밥〉이 도서출판 사유악부에서 나왔다.
시인은 60이 넘어 대학에 진학해서 졸업했으며, 칠십이 넘어 계간 문예지 신인상을 받고 등단했고 등단한 이후 백 편의 시를 쓰고 시집 원고를 완성했다는 심상치 않은 이력을 가졌다. 일찍 사별하고 만학도로서 아들과 딸을 키우며 끝끝내 시작을 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한 권의 시집, 이라는 아름다운 결실을 맺었다는 점에서 무섭도록 시린 고통을 이긴 한 인간의 내력을 본 듯하다.
전체적으로 유연의 시들은 모두 개별적인 정서를 표현하면서도 보편적인 인간의 경험, 기억, 그리고 관계에 대한 반짝이는 통찰을 보여준다. 굳이 유연 시인의 시 세계를 지시한다면
‘극 서정시’해도 무방한 일이다. 서정에 시인의 서사가 조화롭게 안착할 때 나타나는 시가 ‘극 서정시’다.
시집의 서시 격인 ‘사라진 목선’을 먼저 읽어보자.
자신의 무게를 얼마만큼 물 위에 풀어놓은 물버들이
지상의 쓸쓸한 이야기를 바람에 들려주어
수초 곁에서 잠시 아픈 몸을 쉬어가는 목선
먼 섬의 약도를 쥐여 준 소금쟁이가
바람을 흔들어
자 이제 그만 떠나야지
돌아올 수 있을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끼룩대는 저 괭이갈매기들과
하염없이 수평선을 바라보는 여자
아기 사슴 같은 여자를
아기 사슴 섬에 버려두고
홀로 돌아온 젊은 사내의 텅 빈 눈은
겉돌거나 떠돌거나
빼곡히
물풀로 채워 비워놓은
마지막 행간
- 사라진 목선 전문
이 시는 일종의 상실과 떠남에 대한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목선"과 "소금쟁이" 등 자연물들이 화자의 정서를 전달하는 주요 상징으로 작용한다. 또한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여정을 표현하며, 인간의 불확실성과 외로움, 그리고 다시 만나길 바라는 희망을 동시에 드러낸다. 목선 한 척이 섬을 바라보며 해안가에 놓여있다. 시인은 문득 ‘자신의 무게를 얼마만큼 물 위에 풀어놓은 물버들이’ 라는 유화적이고 서정이 충만한 시적언어를 얻는다. 이 문장은 ‘먼 섬의 약도를 쥐어 준 소금쟁이가’로 이어지다가 ‘빼곡히 물풀로 채워 비워놓은 마지막 행간’이라는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목선이 행간으로 변모하면서 생의 쓸쓸한 감정을 성공적으로 치환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에서 빈 행간에 배어 있는 함축적인 여운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마치 솜씨 좋은 화가의 그림이 액자에 걸려있는 듯한 감동을 준다.
유연 시인의 특징은 현대시의 주요 흐름인 분절된 문장의 흐름으로 해석을 거부하는 쪽을 쳐다보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수준 높은 서정시를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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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딸이 늙은 엄마를
청보리밭에 세워놓고
딸 없는 딸이 오래오래 기억하겠다고
엄마 사진만 찍는 딸
각도는 사십오도 딱 좋은데
엄마!
나한테 무슨 감정 있어?
좀 웃어봐
엄마는 원래
가파른 곳에선 웃지 않는다
훗날 딸 없는 딸의 외로움이
당신의 외로움 될까
너도 가파른 길
부축해 줄 딸 하나 있으면 좋을 텐데
엄마 제발
내 나이 서른 하고도 아홉이다
딸이 딸 잇기 가팔라 점점
멀어만 지는 가파도 파도 소리길
- 가파도 전문
모녀의 관계를 배경으로, 세대를 잇는 사랑과 외로움을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가파도는 제주도에 있는 섬. 해마다 청보리 축제가 열린다. 시인은 장성한 딸과의 여행에서 한 편의 울림이 큰 시 한 편을 가졌다. 특히 “가파른 곳”에 서 있는 엄마와 딸의 대화는 물리적 공간과 감정적 간극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딸 없는 딸이라는 표현이 강렬하게 다가오며, 가까이 있으면서도 먼 거리감을 느끼는 현대적 가족 구조의 단면을 드러낸다. 시적 화자의 통찰이 깊이 와닿는데, 그중에서도 ‘엄마는 가파른 곳에선 웃지 않는다’라는 진술은 시인의 오랜 세월 삶에서 나온 진솔하면서도 강렬한 인식의 깊이를 엿보게 한다.